한 권으로 읽는 사르트르의 철학과 문학,
“자유의 철학자”는 왜 “폭력의 철학자”가 되었는가?
20세기를 자신의 세기로 만든 철학자 사르트르, 자유의 철학자라 불리는 그에게 ‘폭력’이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사르트르와 폭력』은 폭력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사르트르의 철학 사상과 문학세계 전반을 탐사한다. 사르트르가 낯선 독자들에게는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사르트르의 사유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사르트르와 젊은 시절을 함께한 독자들에게는 우리가 몰랐던 폭력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사르트르가 정의하는 폭력의 기원, 사르트르의 문학작품에 담긴 폭력에 대한 분석, 사르트르의 글쓰기 이론에서 찾는 대안 모색 등이 그것이다. 폭력의 기원 문제는 사르트르의 전기와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존재와 무』와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통해 조망된다. 두 권의 저서를 통해 각각 폭력의 기원에 대한 존재론적 관점과 인간학적 관점이 검토된다. 다음으로 사르트르의 소설과 극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폭력 현상이 분석된다. 여기서 폭력은 그것이 행사되는 방향에 따라 타자에 대한 폭력과 자기에 대한 폭력으로 구분된다. 마지막으로, 폭력에 대한 대안으로 언어적 대항폭력, 즉 ‘글쓰기-문학’이 제시된다. 사르트르는 이따금 ‘폭력’에 대한 대안으로 ‘폭력’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인간들의 완벽한 상호주체성에 입각한 비폭력적 대안을 목표로 하며, 이는 ‘작가-독자’의 관계가 바탕이 되고 미학과 윤리가 결합한 ‘의사소통적 윤리 모델’로 이어진다.
나를 사물로 만드는 누군가의 시선,
타인이라는 지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단편 「벽」의 주인공 파블로는 감옥 안에서 시선의 폭력을 경험한다. 동료인 톰, 후안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감옥을 방문한 의사에 의해 철저히 객체화된다. 의사는 그들을 응시하고, 그들의 신체를 검사하고, 그들의 상태를 수첩에 기록하면서 파블로와 동료들을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파블로는 자신을 향한 시선에 저항하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그의 몸은 이미 의사의 공격에 노출된 상태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문학작품에는 시선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은 ‘나를 바라보는 자’이고, 타인이 지옥인 이유도 시선을 통해 나를 객체화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느 지도자의 유년 시절」의 뤼시앵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베르제르를 증오하고, 『무덤 없는 주검』의 대독협력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고 있는 마키단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처럼 타인을 제거하려는 인물들조차도 타인이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타인이 죽음 속으로 사라질지언정 나를 바라본 타인의 시선은 영원히 비밀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존재실현을 위해 타인의 시선을 갈망하기도 한다. 사물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반면에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인식하는 존재이다. ‘나에 대한 인식’과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불일치할 때 인간은 실존의 불안을 겪는다. 여기서 나의 존재를 보증해 줄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 『알토나의 유폐자들』의 요한나는 배우로서의 화려한 시절이 끝나자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다. 『철들 무렵』의 다니엘은 자신을 악인으로 여기며,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타인의 평가를 일치시키기 위해 악행을 저지른다. 타자는 나를 사물로 만드는 지옥인 동시에 나의 존재근거를 담보해 줄 수 있는 보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의 인간관계가 이러한 타자의 상반된 지위로부터 출발한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서로를 객체화시키는 시선이 아닌 서로의 자유가 인정받는 방식으로 각자의 존재근거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집단과 공동체를 유지하는 맹세,
“여러분이 나를 살해하는 걸 허락합니다”
『무덤 없는 주검』에서 감옥에 갇힌 마키단원들은 리더인 장이 숨은 곳을 발설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대독협력자들이 가하는 온갖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원 중 한 사람이 장의 위치를 말하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그들은 혼란에 빠진다. 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일원 중 한 명을 제거해야 하는가?
사르트르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서약이라고 말한다. 내가 집단을 배신한다면 나를 살해해도 좋다는 서약, 그러나 반대로 당신이 집단을 배신한다면 우리가 당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서약은 우리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공포와 폭력에 해당한다. 이렇듯 사르트르는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 결국 우리에게 폭력을 가하는 상황에 주목한다. 앞서 살펴본 『무덤 없는 주검』에서 마키단원들은 대독협력자들이라는 적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용인한다. 또 『더러운 손』의 위고는 당의 미래를 위해 당의 서기인 외드레르를 암살하려 한다. 그리고 당에게 버림받은 이후에는 당의 존속을 위해 자신의 범죄동기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런 집단 내의 공포와 폭력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공동의 목표와 신뢰가 없는 개인들은 경쟁에 지배당하는 ‘집렬체’에 불과하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유대감도 없으며, 외부의 압제와 공격에도 무기력하다. 결국 그들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온다. 『파리 떼』의 아르고스 주민들은 죄책감을 잊기 위해 ‘죽은 자들의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는 르네 지라르가 이야기한 ‘희생제의’의 성격을 띠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민들에게 거대한 공포를 안겨 준다. 사르트르는 이런 폭력이 의도하는 것이 바로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완벽한 의사소통이라고 이야기한다. 구성원은 자유의지를 통해 서약을 함으로써, 집단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킨다. 나를 살해하는 타자의 행동은 곧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려 했던 나의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독자’의 관계에서 찾아낸 소통의 윤리
그렇다면 폭력이 없는 상호인정과 의사소통은 불가능한가? 폭력은 오로지 대항폭력으로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사르트르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서 폭력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한다. 작가에게 쓰기 행위란 자신과 세계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즉 작가의 쓰기 행위는 그의 자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한편 독자는 독서 행위를 통해 작가의 작품에 객체성을 부여한다. 이는 작가의 존재근거를 마련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독자의 역할은 작가의 의도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의 쓰기 행위가 독자의 요구에 응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작가의 작품에서 그 자신의 이미지와 그가 속한 집단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가와 독자는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며, 작품의 탄생이라는 공동 과업에 참여한다. 사르트르가 의도했던 완벽한 상호주체성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폭력의 문제는 서로의 존재근거를 확보하는 문제이자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는 문제였다. 개인의 자유가 사라진 상태, 혹은 의사소통이 차단된 상태가 곧 폭력이 지배하는 상태라는 걸 고려하면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폭력의 세기’로 일컬어지는 20세기를 자신의 세기로 만들었던 철학자, 소설가, 극작가 사르트르의 저서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지난 시간을 정리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