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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의 역사-개정판

정신의학의 역사-개정판

  • 에드워드쇼터
  • |
  • 바다출판사
  • |
  • 2020-12-12 출간
  • |
  • 660페이지
  • |
  • 153 X 225 X 39 mm / 947g
  • |
  • ISBN 979118993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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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정신의학의 역사를 쓴다는 것
과학과 사회의 틈새를 질주하는 기록

근대 이전 광인은 각 가정이나 마을에서 알아서 “처리”되었고, 17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정신의학은 ‘대감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그 첫발을 내딛었다. 의사들은 저급한 뇌수술을 시행하였고, 환자들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두개골을 절단당하고, 냉온수 마찰과 전기충격 같은 근거없는 치료법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그로부터 50년 후 현대의 정신과 의사집단은 개인의 성격적 특이성과 실존적 고통을 모조리 질병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으며, 거대 제약회사는 프로작 같은 정신약물을 가정 상비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책이 쓰는 역사는 직선적이다. 18세기 말 치료 수용소의 등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세기 말 정신과 개원의의 조용한 진료실에서 끝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정신의학을 장악했던 프로이트 이론은 겨울의 마지막 눈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정신의학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시점이다. 정신질환의 근거가 뇌에 있다고 보는 흐름은 우리 시대에 와서 뇌에 최우선 순위를 둔 생물학적 관점에 도달했다. 또한 이 책이 쓰는 역사는 지성의 역사가 아니라 망각된 인물을 생생하게 복원하는 사회사이다. 정신의학이 문화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초점을 맞출 것이다. 종종 순수한 과학의 승리라고 묘사되는 사건에도 문화와 상업성이 어떻게 침투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의 원서《A History of Psychiatry》는 1997년에, 한국어판 역서는 2009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2020년, 역서의 개정판이 출간된다. 대략 1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2009년의 정신의학을 1997년의 특성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범위가 넓어진 것으로 본다면, 2020년은 10여 년 전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200여 년 동안 정신의학이 추구해 온 궁극적인 주제는 사회적 가치관과 정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질환의 과학적 실체를 찾는 것이었다. 의료는 질병을 넘어서 삶의 불행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가? 어느 지점에서 ‘필요’가 ‘욕구’로 넘어가는가?
(옮긴이의 말 545쪽 참조)

질병 극복의 영웅담이 아닌
인간을 향한 의학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담긴 역사

정신의학의 역사를 사회사적 시각으로 살핀 캐나다의 저명한 의학사학자 에드워드 쇼터의 《정신의학의 역사》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의 원서 초판은 1997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정신의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또한 단순히 정신의학 전공자를 위한 역사 교재가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인간 정신의 실존적 고통에 대한 의료화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사회적 의미를 지닌 책으로도 평가받아 왔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일반적인 의학사와는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질병의 극복과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 같은 영웅담으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면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은 광인들, 끔찍하고 치욕적인 수용소, 냉온수 마찰과 전기충격, 각종 쇼크요법 등 저급하고 비인간적인 치료법까지, 인간에 대한 의학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정신의학이다.
18세기 말 치료적 수용소의 풍경에서 시작된 이 책의 이야기는 20세기 말 정신과 개업의의 조용한 진료실에서 끝난다. 푸코의 ‘대감금’ 주장에 대한 반박, 초기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 프로이트에 대한 혹평 등 이 책에는 우리가 전혀 몰랐거나 일면만 알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반전으로 가득하다. 또한 최근 거대 제약회사들이 벌이는 정신이상의 의료화 음모에까지 파고들면서 정신의학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수용소의 환자 기록으로 본
푸코의 “대감금”에 정면 반박하는 근거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의학이 국가권력에 의한 인민의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병리를 관료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당시 유럽 전역에 “대감금”이 있었다고 말한다. 푸코의 이런 주장은 20세기 지식인들 사회에서 대유행을 하게 되었고, 정신의학에 대한 편견과 오명을 강화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푸코가 말하는 “대감금”은 어처구니없는 난센스에 불과하다. 푸코는 “정신의학”이 국가권력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 하는데, 국가 통제가 강력했던 독일에서도 19세기까지는 ‘정신과’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또한 저자는 수많은 역사적 기록과 통계자료를 들어 당시의 광인 수용 시설과 수용자의 수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장 컸던 시설인 비세트르도 사실상은 종합병원 시설이었고, 여기에 수용된 광인은 간질환자와 정신지체를 포함하여 245명뿐이었다.
푸코가 ‘대감금’의 사례로 꼽은 잉글랜드에도 1826년의 조사를 보면 공립이든 사립이든 수용소에 있던 사람은 소수였고, 베들렘과 세이트 루크 병원에 있는 환자를 다 합쳐도 500명이었다. 감옥에 있던 자 중 광인으로 분류된 사람도 53명뿐이었다. 따라서 푸코의 말처럼 정신질환자가 3000만 명이 넘었다는 ‘대감금’의 근거는 희박하다.

“봐라, 봐라. 저기 미친놈이 간다”
정신과가 없던 세상, 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튼튼한 남자나 여자가 미쳤다고 간주되면, 마을에서 이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라고는 오두막 바닥에 구멍을 파서 밀어넣은 다음 기어나오지 못하게 덮는 것이다. 구멍의 깊이는 1.5미터 정도 …… 대개는 그 안에서 죽게 된다.” _ 1817년 아일랜드 지역구 의원의 기록 (본문 14쪽)
정신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정신병은 부분적으로는 생물학적이고 또 유전적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이 정신병자를 돌봐 왔고 관리 지침서 등이 있긴 했지만, 18세기 말 이전까지 전문 의학 분야로서의 정신과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18세기 이전까지 광인을 돌보는 주체는 가정이나 마을이었다. 그러나 ‘돌봄’의 방식은 매우 드물었다. 전통 관습과 사회적 역할이 중요했던 그 시절, 마음과 기분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다뤄졌다.
1870년 스위스 프라이부르크 주에서 정신병자 실태를 조사했다. 확인된 164명의 정신병자 중 5분의 1은 냉방이나 광에 묶여 있어서 “비좁고 어둡고 습한 곳에서 오물 냄새에 절어” 있거나 “자기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짚더미에” 있었다. 집안이나 마을에 광인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그래서 행여 수용소가 있다 하더라도 가정 단위로 범죄에 가까운(강제격리)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회개혁가인 도로시아 딕스가 메사추세츠 주의 시골을 다니며 발견한 것은 “새장에 갇힌 여자” “사슬에 묶인 정신박약 한 명” “17년간 축사에 갇혀 있던 사람” “쇠창살 우리 안에 네 명의 여자” 등이었다. 이런 일화들은 극단적이고 기괴한 상황이 아니라 당시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정신의학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환자들은 관대한 처우를 받지 못했으며, 멋대로 돌아다니게 방치되지도 않았다. 동정심 없는 야만스러운 처우와 추방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모든 것이었다.

“치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사회로 복귀할 가능성은 있다.”
계몽주의적 의사들의 등장과 치료적 수용소의 탄생

1793년, 프랑스의 자코뱅 정부는 38세의 젊은 의사 필립 피넬에게 비세트르 호스피스의 운영을 맡긴다. 계몽주의와 사회진보철학에 고취된 피넬은 비세트르에서 정신질환의 치유 가능성과 인도주의적 돌봄이라는 개혁주의적 이상을 발휘한다. 그는 이곳에서 광인을 사슬로부터 풀어내 명성을 얻게 되고, 그 덕에 1795년 살페트리에르의 원장이 되면서 그곳에서도 광인의 사슬을 풀어 주었다. 필립 피넬의 주장은 명료했다. 수용소 감금은 치료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수용소의 본질은 심리적 치료를 하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환자들과 친밀했고, 따듯한 목욕으로 환자를 안정시켰으며, 환자들은 부지런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프랑스에 필립 피넬이 있었다면, 독일에는 할레 대학의 요한 레일이 있었다. 수용소의 끔찍한 실상에 경악한 계몽주의자 레일은 인류애와 시민의식이 실종한 이 불행한 사태를 해결할 이는 의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용소가 가족은 제공할 수 없는 시설과 보조적 치료를 담당하는 곳이어야 한다며 인간적 대우를 강조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18세기 후반으로 넘어서면서 정신병자 수용소는 치료적 수용소로 조금씩 탈바꿈하고 있었다. 당시 수용소가 치료적 효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동체 정신을 갖춘 환경, 또 하나는 의사-환자 관계였다. 이중 의사-환자 관계를 강화한 방식은 “도덕치료”라고 불렸고, 이는 수용소가 이전의 “광인의 집”과 구별되는 새로운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누구도 나에게 이런 것을 물어보지 않았어요!”
정신분석은 과연 정신의학의 혁명인가, 역사적 퇴보인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역사상 반세기에 이르는 커다란 ‘단절’이었다. 정신분석이 정신의학계를 지배한 몇 십 년 동안 정신의학은 일반의학으로부터 멀어지고, 과학적 발전은 오랫동안 침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단절이 정신의학계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다. 그중 가장 큰 의의는 정신과 의사들을 수용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식의 정신분석은 정신과 의사로 하여금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진료소에서 환자를 보는 전문의사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게 해주었다.
정신분석에 대한 기존 정신의학계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성이 정신질환의 원인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주류 정신과 의사들은 “프로이트 식 사교에는 구역질이 난다”거나 “경험 많은 정신과 의사가 역겨움을 느끼지 않고 프로이트를 읽을 수는 없다”고 반응했다.
이와 같은 학계의 부정적인 반응과 달리, 중산층 사회는 프로이트에 열광한다. 이러한 열광의 배경에는 정신적 고통을 안고 있는 고학력의 중산층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광인의 수용소’에 갇혀야 하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련된 상담실에서 두어 시간의 상담으로 해결될 수 있는 비교적 ‘멋져 보이는’ 문제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분석은 독일 사회에서 최신 유행상품이 된 것이다.

신앙이 된 정신분석, 세계를 장악하다

프로이트와 함께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를 쓴 요제프 브로이어는 본래 “환자가 찾아 주지 않는 신경과 의사”였던 프로이트에게 “일거리를 주려고” 유태인 히스테리 소녀 환자 한 명을 소개시켜 주었다. 프로이트는 이 소녀를 비롯한 일련의 젊은 여자들의 얘기에 들어 있는 성적 요소에 골몰하게 되고, 현실의 정신적 고통은 어린 시절의 성적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난다는 자신의 이론을 확립하게 된다.
1902년 프로이트는 자신의 집에서 매주 수요일 토론 그룹을 이어갔고, 그러면서 자신의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문제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학설을 퍼뜨리는 데 하도 열성적이어서, 그것을 환자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연구하는 방법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종의 운동으로 변환시키려 했다는 데 있다. 이 수요그룹에게 있어 프로이트라는 지도자의 말은 신앙과 같았고, 반대는 불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모두 프로이트가 보내 주는 환자에 의존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는 세계대전 전후의 유태인 박해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의 유태인 정신분석가들에게 미국은 새로운 신천지였고, 유행에 민감한 미국인들은 곧바로 정신분석에 열광하게 된다. 망명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정신분석이 일종의 ‘문명화의 사명’이자 전 세계에 주는 치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뉴욕에서는 정신분석을 받고자 안달하는 속칭 ‘뉴요커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실제로 1932년 미국 정신분석협회의 회원은 92명이었는데, 1968년에는 그 수가 1300명으로 증가했다. ‘미국 정신분석의 황금기’라는 1960년대에는 20개의 훈련연구소와 29개의 지역협회가 있었고, 심지어는 정신과 의사가 군복무 중 정신분석훈련을 받을 때는 군에서 그 비용을 대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높은 볼트로 해보게.”
뇌엽절제술과 전기충격요법... 정신실험의 잔혹사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기본 이념은, 정신이상이 그저 마음의 질병이 아니라 뇌의 특정한 기능이상으로 인해 발생한 생물학적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초기 수용소 시절의 끝 무렵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정신이상이 광인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광기의 돌’ 때문이라며, ‘일단 절개하고 보는’ 외과적 처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는 ‘신화’의 시대일 뿐 ‘과학’의 행위는 아니었다.
초기의 외과적 처치는 미숙했고, 위험했다. 특히 194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에가스 모니즈는 뇌엽의 일부를 파괴하는 ‘뇌엽절제술’을 통해 인간의 뇌를 야만적으로 유린했다. 모니즈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월터 프리먼은 안구의 천정을 통해 뇌에 기구를 찔러 넣어 절제하는 기법인 횡안와 뇌엽절제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뇌엽절제술이 관리하기 힘든 광폭한 환자를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판단력 상실, 사회적 기능 상실을 유발했고, 사회생활의 요령을 알아채는 데 둔감해지고 부적절하게 억압된 상태를 만들었다.
1930년대에는 인슐린으로 혼수상태에 빠뜨렸다가 깨어나게 하는 인슐린 혼수요법, 메트라졸을 주입하여 경련을 유도해 증상을 개선하려는 메트라졸 경련요법 같은 치료법 들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그다음을 이은 것이 로마 대학의 우고 체를레티가 1938년에 처음 사용한 전기충격요법(ECT)이었다. 이는 전기적 충격을 뇌까지 도달하게 하여 경련발작을 일으키는 방법이었다.

다시 한번 “찍-” 하고 전기 소리가 들렸다. 환자는 꼼짝 않고 누워 있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높은 볼트로 해보게.”
이때 환자가 말했다. “보세요. 첫 번 것은 귀찮았고, 두 번째는 죽을 뻔했습니다.”
수련의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봤다.“자, 계속하지. 내버려두고.” 체를레티가 말했다.수련의는 장비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세 번째 전기충격 후에 환자는 전형적인 간대성 대발작 간질을 시작하더니, 규칙적으로 근육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호흡이 멈췄다. 얼굴이 퍼렇게 변하더니, 심박동이 급하게 뛰고 동공반사가 소실되었다. 48초 후에 환자는 큰 숨을 내쉬었다. 의사들도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들은 이제 막 인간을 대상으로 안전하게 경련을 유발할 수 있는 전기의 양을 확정한 것이었다. (본문 361쪽)

전기충격요법은 분명 정신분열증의 완치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증상을 완화시켜 주고 환자 개인이 다소간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1959년이 되자 전기충격요법은 조울증 환자와 주요 우울증 환자에게 “필수적인 치료법”이 되었다. 그것은 효과적이고 신속했으며, 환자들도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기충격요법은 정신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여기에는 정신분석의 등장과 정신약물학의 발달이 큰 역할을 했다. 고급스러운 소파에 누워 잘 차려입은 정신분석가와의 면담에 비하면, 간단하게 처방되는 한 봉지의 약에 비하면 전기충격요법은 불확실성도 크고, 무엇보다 지극히 비인간적이었다.

“프로작이 세상을 지배하리라!”
정신약물학과 거대 제약회사의 등장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은 한때 개인뿐 아니라 가정, 지역사회에 있어서도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신경성’이라는 용어의 탄생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그것의 수치스러움을 가려 주었고, 1987년에 FDA 승인을 받은 프로작에 이르러 그것은 고학력 중산층의 유행이 되었다. 프로작으로 대표되는 정신약물의 등장은 ‘미용 정신약물학cosmetic psychopharmacology’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정신이상에 씌워진 오명을 없애 주었다. 이제 도시의 중산층들은 자신의 심리적 고통과 실존적 고뇌를 숨기려 하지 않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신들의 ‘프로작 경험’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P’로 시작하는 단어는 더 이상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 아니라 이제 프로작prozac이 되었다.
사실 미국 대중이 열광한 첫 번째 정신과 약은 ‘밀타운’이라는 신경안정제였다. ‘행복의 약’ ‘마음의 평화를 위한 약’이라는 기사로 소개된 이약은 순식간에 미국을 휩쓸었다. 1956년의 조사에서는 미국인 20명 중 1명이 그 약을 복용했다. 1970년에는 미국 여성 5명 중 1명, 남성 13명 중 1명이 ‘가벼운 신경안정제와 진정제’를 복용했다. 이후 정신약물 처방은 갈수록 늘어 1975년에는 진료소당 25.2%의 환자가 약 처방을 받았다면, 1990년에는 50.2%의 환자가 처방전을 받아 갔다.
이후 프로작을 위시한 일련의 정신약물은 제약회사의 마케팅력에 힘입어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 미국 정신의학은 단순한 불행감, 식욕감퇴, 수면장애 등을 모두 우울증으로 정의하였고, 우울증 진단은 어린 아이에게도 내려지기 시작했다. 사내아이들의 떠들썩한 행동은 ‘과잉행동 증후군’(ADHD)으로 정의되었고, ‘리탈린’이라는 약물이 처방되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흔히 겪는 유령 공포 따위에도 정신과 진단명이 붙여졌고, 약이 처방되었다.
정신약물학을 지배하는 거대 제약회사들의 로비를 받은 정신의학계 모임은 새로운 진단명을 끊임없이 만들어 냈고, 제약회사는 이 새로운 진단명에 맞는 선택적 치료제를 꾸준히 만들어 냈다. 이렇듯 어느 수준 이상이어야 질병인지를 판단하는 질병역치가 꾸준히 낮아지면서, 정신과 환자의 범위는 유례없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은 두어 시간에 걸친 면담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맞는 처방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정신과 의사는 어느새 그저 신기한 약을 처방해 주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목차


서문

제1장 정신의학의 탄생
정신과가 없던 시절, 광인들은 집에 묶여 있거나 길거리를 배회하거나, 혹은 호스피스 등에 치매, 걸인, 부랑자들과 뒤섞여 감금되었다. 19세기 비로소 정신병자 수용소가 탄생하면서 정신의학은 비로소 독립된 전문분과로서 첫발을 뗀다.

제2장 수용소의 시대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치료적 수용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구속과 사슬이 없어지고 광란의 울부짖음도 사라지는 그 즈음 수용소는 몰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초만원으로 변하는 수용소에서, 의사들은 밀려오는 환자들에 짓눌린다.

제3장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탄생
19세기 과학혁명의 물결은 틀이 잡혀 가던 정신의학에도 흘러 들어왔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이 운명이 아니라 뇌의 질병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빈약한 근거와 퇴행이론 등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악용된다.

제4장 신경성 질환의 시대
혐오의 대상이 된 정신의학, 하지만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환자와 대중의 혐오를 피하고 부자 환자를 유치하려는 의사는‘신경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신경성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온갖 치료법이 난무하던 이 시기 드디어 심리적 치료의 싹이 튼다.

제5장 정신분석, 그리고 정신의학의 단절
각종 요법이 성행하던 시기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고안해 내어 부르주아 계층의 자기성찰 욕구를 채워 주게 된다.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은 정신분석을 치료에 적용하고, 더 나아가 운동의 차원으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제6장 대안을 찾아
정신분석과 수용소 사이에서 정신과 의사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신경매독의 열치료법과 수면연장법 등은 약물혁명을 예고했는가 하면, 전기충격요법과 뇌엽절제술은 격렬한 반反정신의학 운동을 야기했다. 그리고 치료공동체라는 새로운 대안이 등장한다.

제7장 생물정신의학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의학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정신질환의 후천적 원인을 주장하는 정신분석 진영과, 유전적, 뇌화학적 요인 등 기질적 원인을 주장하는 진영, 그리고 그 사이의 절충적 시각이 혼재하는 과도기적 시기가 다가온다.

제8장 프로이트에서 프로작으로
지역사회 정신의학은 실패하고, 온 세계를 휩쓸던 정신분석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약 회사의 주도로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약물이 대중의 욕구를 채워 주게 된 것이다. 이 변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항우울제 프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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