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담기 close

장바구니에 상품을 담았습니다.

북학의

북학의

  • 박제가 ,마현준(풀어씀)
  • |
  • 풀빛
  • |
  • 2021-01-22 출간
  • |
  • 240페이지
  • |
  • 153 X 212 mm
  • |
  • ISBN 9791161727875
판매가

15,000원

즉시할인가

13,500

카드할인

0원(즉시할인 0%)

적립금

750원 적립(5%적립)

배송비

2,300원

(제주/도서산간 배송 추가비용:3,000원)

추가혜택

네이버페이 무조건 1%적립+ 추가 1%적립

수량
+ -
총주문금액
13,500

※ 스프링제본 상품은 반품/교환/환불이 불가능하므로 신중하게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판사서평




? 사회 개혁의 길을 북학에서 찾으려 한 혁명가 박제가

박제가는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1750년에 태어났다.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회적 천대를 받고 가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으나 문장과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천재성을 지닌 뛰어난 학자로 자랐다. 19세 때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실학을 받아들이고 이덕무ㆍ유득공ㆍ이서구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쌓았는데, 이들을 ‘백탑파’라 불렀다. 이들은 글 솜씨가 뛰어나 1777년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이 이들의 시를 묶어 《한객건연집》이라는 책을 출간해서 중국의 문인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박제가는 신분 제도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사상을 주장하기도 했고, 정약용과도 친교를 맺고 교유했다.
당시 조선은 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고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따라서 명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을 조천사로 부르고 청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을 연행사로 낮춰 불렀는데, 박제가는 연행사의 일원으로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다. 1차 연행이 1778년, 2차와 3차 연행이 1790년, 4차 연행이 1801년에 있었는데, 특히 1778년 처음 연행을 다녀와서 보고 들은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 《북학의》다. ‘북학파’라는 명칭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북벌’이나 ‘북학’이 다 같이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방법은 서로 반대였다. 박제가처럼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자는 입장에서는 ‘북벌’은 실천은 없고 구호로만 그친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으며,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당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그래서 현실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을 한다면 양반일지라도 도태시켜야 한다는 극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학문을 오직 개인의 출세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풍토를 전면으로 비판했다. 《서경》에 ‘정덕이용후생’이라는 말이 있다. ‘정덕’이란 유교에서 추구하는 윤리적 가치인 올바르고 관용적인 행동을 말하며 ‘이용’과 ‘후생’은 백성의 풍요로운 생활을 뜻한다. 당시 전통적 학설은 정덕이 제대로 서야 이용후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는 이용후생, 곧 경제가 넉넉해야 올바른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다시 말하면 정덕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이용후생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박제가는 정덕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정덕의 훼손도 염려했던 균형 잡힌 개혁가였다.
박제가가 1779년 6월 이덕무ㆍ유득공ㆍ서이수와 함께 초대 검서관이 된 것은 그의 삶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개혁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서얼들을 검서관에 발탁하는 정책을 시도한 덕분이었다. 정조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자리인 검서관 생활로 시작한 30대 이후 박제가의 삶은 희망과 좌절의 반복이었다. 1786년 정조가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라고 신하들에게 명했을 때 박제가는 《북학의》에 기초해 국가 개혁안을 과감하게 올렸는데, 어느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90년 이후 박제가는 세 차례나 더 연행에 참여했고, 중국 최고의 학자부터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인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조선 개혁에 대한 꿈도 키워 나갔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박제가의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사돈인 윤가기의 역모 사건에 연루시켜 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이로 인해 정조 사후 불과 5년 만에 박제가 역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록 신분적 차별과 사상적 급진성으로 인해 순탄한 삶을 누리지는 못 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굽힌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꿈꾼 나라는 오직 가난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없고 신분의 차별이 없는 풍요로운 조선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본격적으로 펼친 29세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25년여를 초지일관한 진정한 선비였다.

? 명분 대신 실리, 모순된 신분 제도 대신 부국강병을 꾀한 개혁서 《북학의》

《북학의》는 선진국 청나라를 모델로 조선의 개혁을 추구한 부국강병의 경세 방침을 제시한 책이다. 다루는 내용은 사람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부터 수레나 배, 도로와 같은 사회 기반 시설, 그리고 과거 제도와 같은 사회 제도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전체 구성은 내편(內篇)과 외편으로 나뉘어 있다. 내편은 수레, 배, 기와, 벽돌 등 39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중국에서 사용하는 일상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기구에 대한 소개 및 조선에서의 개혁안을 제시한다. 외편에는 자신의 제도 개혁에 대한 의견을 담은 평론 형식의 글이나 정책에 관한 의견 등을 실어 놓았다. 특히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설 분야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 건의, 과거 시험에 대한 개선책, 중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역을 주장한 글 등 17개의 항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영조가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직접 관리하던 논밭을 두어 농사에 참여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고 추가로 작성하여 상소문 형식으로 올렸는데, 이 〈진소본북학의〉 역시 《북학의》에 수록되어 있다.
《북학의》에 담긴 개혁 방안의 핵심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북학의》는 당시 조선의 젊은 학자들에게 많은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거짓말이라 믿지 않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랑캐로만 알았던 청이 조선보다 선진 문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청의 발전된 문물을 오랑캐의 것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백성들의 가난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배우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박제가는 피력했다.
둘째, 이용후생이다. 지금껏 덕을 강조한 조선의 풍토가 실질적으로는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일과 별개로 움직였으므로 넉넉한 삶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전 농업 기술을 배우고 원활한 유통을 위한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셋째, 자주적 통상론이다. 전통적 미덕인 검약과 소비 억제보다는 적극적 소비 활동으로 나라의 부를 늘려야 하며, 이를 위해 청과의 교역은 물론 다른 나라와도 활발하게 교역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상인과 무역상들에 대한 천대와 편견을 없애는 것부터 필요하다고 하면서, 넓게 볼 때 사농공상의 가치의 위계를 뒤엎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넷째, 국방력 강화다. 이를 위해 문벌과 당파에 휘둘리고 부패로 얼룩진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한다. 동시에 과학 기술에 바탕을 둔 무기를 개발하고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통해 정예병을 육성할 것을 강조한다.
《북학의》는 다소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조선의 현실을 냉혹하게 비판하고 중국의 문물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북학의》는 백성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수수방관하던 지식인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한 쓴소리였다. 사실 박제가의 개혁론과 자주적 통상론이 옳았다는 것은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 《북학의》는 왜 오늘날 의미 있는가

《북학의》는 이후 ‘북학’이라는 학문의 이름을 탄생하게 만든, 선구적이고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집필할 무렵, 서양에서는 산업 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무렵 박제가는 동남아 등지의 상인이나 사신들을 통해 서양 세력이 엄청난 기술과 군사력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 세계로 접근하고 있다는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과 개방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면에는 곧 닥쳐 올 국가의 위기를 예견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하고자 한 측면이 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조선 조정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기는커녕 공리공담이나 일삼는 낡은 풍조 속에서 소중화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제 역할을 방기한 채 백성들의 곤궁한 현실까지도 외면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박제가는 중국의 개방된 사회 모습과 합리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자세, 그리고 실질적인 것을 숭상하는 백성들의 생활을 보면서 진취적인 발전을 방해하는 조선 지배층의 고루함을 타파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북학의》를 통해 박제가가 진정으로 고민한 것과 그가 이루고자 한 꿈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주적이고 부강한 조국과 풍요롭고 정의롭게 사는 민초들을 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당리당략에만 빠져 국민을 위해야 하는 정치인의 본질을 잊은 지금의 정치, 보이지 않는 벽 신분 차별에 묶여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는 지금의 사회에 박제가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러 가지 사회 개혁 방안이나 국부 증대의 문제와 관련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다 보면 박제가가 《북학의》에 담은 주장이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하는 좌표로 또렷이 빛날 것이다.


목차


‘청소년 철학창고’를 펴내며
들어가는 말
《북학의》를 이해하는 길라잡이

1장 북학에 대한 논의
1. 왜 북학인가?
2. 북학의를 임금께 올리면서

2장 제도와 풍속의 개혁
1. 과거 제도
2. 관직
3. 군대 제도
4. 장례 제도

3장 사회 기반 시설의 개선
1. 수레의 활용
2. 배의 활용
3. 도로 정비
4. 다리 설치
5. 벽돌 제작
6. 성곽 구축

4장 농업과 목축의 장려
1. 농기구에 대한 여섯 가지 원칙
2. 밭
3. 거름
4. 목축
5. 소

5장 상업과 교역의 장려
1. 사대부의 상거래 참여
2. 시장과 우물
3. 중국과의 교역
4. 중국어를 공용어로
5. 통역

6장 생활용품의 개선
1. 간장과 된장
2. 골동품과 서화
3. 종이
4. 가옥
5. 약재

박제가, 북학에서 길을 찾다
박제가 연보

교환 및 환불안내

도서교환 및 환불
  • ㆍ배송기간은 평일 기준 1~3일 정도 소요됩니다.(스프링 분철은 1일 정도 시간이 더 소요됩니다.)
  • ㆍ상품불량 및 오배송등의 이유로 반품하실 경우, 반품배송비는 무료입니다.
  • ㆍ고객님의 변심에 의한 반품,환불,교환시 택배비는 본인 부담입니다.
  • ㆍ상담원과의 상담없이 교환 및 반품으로 반송된 물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ㆍ이미 발송된 상품의 취소 및 반품, 교환요청시 배송비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ㆍ반품신청시 반송된 상품의 수령후 환불처리됩니다.(카드사 사정에 따라 카드취소는 시일이 3~5일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 ㆍ주문하신 상품의 반품,교환은 상품수령일로 부터 7일이내에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ㆍ상품이 훼손된 경우 반품 및 교환,환불이 불가능합니다.
  • ㆍ반품/교환시 고객님 귀책사유로 인해 수거가 지연될 경우에는 반품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 ㆍ스프링제본 상품은 교환 및 환불이 불가능 합니다.
  • ㆍ군부대(사서함) 및 해외배송은 불가능합니다.
  • ㆍ오후 3시 이후 상담원과 통화되지 않은 취소건에 대해서는 고객 반품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품안내
  • 마이페이지 > 나의상담 > 1 : 1 문의하기 게시판 또는 고객센터 1800-7327
교환/반품주소
  •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11 1층 / (주)북채널 / 전화 : 1800-7327
  • 택배안내 : CJ대한통운(1588-1255)
  • 고객님 변심으로 인한 교환 또는 반품시 왕복 배송비 5,000원을 부담하셔야 하며, 제품 불량 또는 오 배송시에는 전액을 당사에서부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