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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무 번

어쩌면 스무 번

  • 편혜영
  • |
  • 문학동네
  • |
  • 2021-03-17 출간
  • |
  • 232페이지
  • |
  • 133 X 200 mm
  • |
  • ISBN 9788954677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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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평화롭고 목가적인 시골이 한순간 밀폐된 공간으로 변할 때,
우리를 타격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바로 가족일 때,
잠시에 불과했던 일이 평생에 걸쳐 지속될 때

철거되는 중인지 새롭게 지어지는 중인지 모를 건물처럼
우리를 둘러싼 이중의 조건과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편혜영의 물기 어린 시골-가족 설계도

소설집 처음에 자리한 표제작 「어쩌면 스무 번」의 주인공 ‘나’는 치매를 앓는 장인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산골로 이사한 참이다. 주위에 옥수수밭이 가득하고 가장 가까운 이웃집이 삼백 미터 넘게 떨어져 있을 만큼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의 삶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한 보안업체 직원들이 집을 찾아온다. 위험에 노출되어도 도움을 구하기 어려운 환경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회사와 계약할 것을 은근하게 강요하는 그들의 말에 아내와 ‘나’는 왠지 모를 공포를 느낀다. ‘재산과 목숨’을 지켜준다고 말하는 그들이 다른 그 무엇보다 아내와 ‘나’를 불안에 휩싸이게 하는 그 아이러니가, 치매 증세가 심각해진 장인을 둘러싼 이들의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어지는 소설 「호텔 창문」 「홀리데이 홈」 「리코더」를 연달아 읽으면,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편혜영의 시선이 한층 더 깊고 치밀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죄책감’ ‘수치심’ 등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 「호텔 창문」의 ‘운오’는 19년 전 강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사촌형에게 구조되었고, 사촌형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후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대신해 살아난 운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에 걸맞게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운오는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던 형이 자신을 살린 걸 생각하면 언제나 의아한 기분이 들 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홀리데이 홈」도 관계와 감정을 둘러싼 인물의 복잡한 모습을 드러낸다. ‘장소령’이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한 직업군인 ‘이진수’는 소령에서 더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한다. 물품의 납품단가를 부풀리는 일에 가담했다가 그 일이 알려지면서 책임을 질 사람으로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진수는 식당을 차려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육우를 한우로 속여 판 것이 적발된 뒤 손님이 줄어 결국 아파트를 팔고 전원주택마저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어느 날, 두 남자가 집을 보러 이들을 찾아온다. 그들은 과거 이진수가 저지른 또다른 일에 대해 무언가 아는 듯이 그를 추궁하려 드는데, 그 추궁은 이진수뿐 아니라 이진수 곁에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도 내내 침묵한 장소령을 향해 있는 것만 같다.
「호텔 창문」과 「홀리데이 홈」이 어떤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일부러 모른 척하는 인물의 이야기라면 「리코더」는 어떤 감정을 떨쳐낼 수 없는 인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빚이 쌓인 ‘무영’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수오’의 집에 얹혀살게 되는데, 얼마 안 돼 수오가 증발하듯 사라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무영을 의심해 그를 추궁하지만, 경찰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무영과 수오가 고등학교 시절 수련장이 붕괴되는 사고를 함께 겪었다는 사실, 두 사람은 운좋게 구조되었지만 같은 반의 다른 친구는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무영은 수오의 실종이 어쩐지 그 일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수오가 말한 ‘마지막 말’을 되새기는 무영의 모습에, 감정을 좀처럼 발설하지 않고 건조하게 서술하던 편혜영의 소설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뭉클함과 애틋함이 고여든다.
이런 변화는 「리코더」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업이 망하고 치매에 걸려 실종된 남편 때문에 술에 점점 의존하게 된 ‘미조’가 외국에 사는 딸의 집을 방문하는 이야기인 「플리즈 콜 미」, 고요하게 일상을 이어나가리라고 짐작하던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가는 ‘나’가 과거를 돌이키며 시작되는 「좋은 날이 되었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딸을 대학에 보내려고 보험에 드는 등 삶을 반듯하게 꾸려나가기 위해 애쓰던 엄마의 노력이 헝클어지고 마는 모습을 그려낸 「미래의 끝」과 같은 작품들 역시, 미래를 전망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인물들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마냥 비관 속에 잠겨 있게 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잠시나마 따스하고 부드러운 순간들이 이들에게 분명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급속도로 나빠진 뒤에도 미조와 딸이 서로를 애틋하게 쳐다볼 때(「플리즈 콜 미」), ‘나’가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환하게 웃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좋은 날이 되었네」), ‘동방생명 아줌마’가 혼자 남겨진 ‘나’의 손을 잡고 집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미래의 끝」),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환함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사소한 액수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빚처럼, 우리는 삶이 돌이킬 수 없이 어그러지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엉킨 매듭의 어떤 부분을 풀어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삶은 처음부터 얽히고 꼬여 앞뒤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편혜영 소설 속의 ‘반전’과 ‘비밀’은 트릭에 걸려 넘어진 인물을 둘러싼 상황을 말끔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해결책이 아니다. 반전과 비밀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설사 그것이 풀리고 난 뒤에도 우리는 또다른 반전과 비밀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한 편의 거대한 추리소설과 같다는 사실을 편혜영은 이토록 세련되고 우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편혜영의 소설은 정교하고 섬세하게 세공된 열쇠를 닮았다. 필요불가결한 단문들로 이루어진 서사를 좇아 맨 끝에 다다른 뒤에야 독자는 눈을 껌뻑이다 이내 탄식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열쇠와 맞아떨어지는 자물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무표정한 채 꾹 닫혀 있다. 미셸 투르니에에게 자물쇠 없는 열쇠를 가진 사람은 ‘두 발을 묶어놓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또 열쇠 없는 자물쇠에 대해 ‘해명해야 할 비밀, 밝혀져야 할어둠, 판독해야 할 암호’라고 했다. 편혜영을 읽는 일은 ‘비밀과 어둠과 암호 들’로 빽빽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물음표 열쇠를 손에 꼭쥔 채. _정이현(소설가)



“내게 있어 소설은 언제나 처음에 쓰려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자리이거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멈춘다. 이제는 도약한 자리가 아니라 착지한 자리가 소설이 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 낙차가 소설 쓰는 나를 조금 나아지게 만든다는 것도, 그렇기는 해도 나아진 채로 삶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이 낙차와 실패를 잘 기억해두고 싶다.” _‘작가의 말’에서


목차


어쩌면 스무 번 … 007
호텔 창문 … 035
홀리데이 홈 … 061
리코더 … 089
플리즈 콜 미 … 115
후견 … 141
좋은 날이 되었네 … 169
미래의 끝 … 199

작가의 말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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