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쓴 시가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시를 누가 먹어버리거나,
숨쉬어버려서 그대로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래서, 내 시가 잠시만이라도
그 사람의 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중에서〉
▷ 작가의 말
예술,
아름다움을 찾아
한 묶음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나서, 작가의 말은 곧 써서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다. 출판사의 눈치가 보이는 듯했지만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다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이런 일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라 왜 시작을 못하는지 나 자신도 궁금해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그 해답을 알 듯도 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마도 이 엄혹한 시절, 코로나19 팬데믹의 비극이 온 세상을 뒤덮은 처참한 암흑에서 오늘도 수많은 생명이 비명 속에 죽어가고 시신을 덮을 관도, 묻을 땅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지구. 살아 있는 사람조차 마주 보고 담소도 주고받지 못하는 날들이 도대체 얼마나 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서로가 서로를 피하려고만 하는 이 암담한 외면 속에서 무슨 문학이, 무슨 음악 듣기가, 무슨 그림 구경이, 또 무슨 지난날의 동서남북 여행기가 도대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야단을 치는 듯해서였다. 거기다가 내가 즐기는 음악이나 그림 감상이나 연극, 영화, 무용 공연이나 잡독의 독서가 뭐 그리 대단한 수준이라고 이 나이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낯간지럽게 책으로 출간하느냐는 질책이 귀에 들리는 듯해서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게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렇게 경계가 다 막힌 경험해보지 못한 창백한 세상이기에, 치기 어린 내 생의 미로가 어쩌면 누구에겐가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잠시나마 푸근하고 편안한 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예술의 전문 분야를 전공하고 깊이 공부한 분의 학문적 분석이 아니고 그냥 하루하루의 생활 중에 만나는 예술의 즐거움, 내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오랜 세월 나와 함께 살면서 나를 살려준 고마운 은인. 젊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진한 외로움을 달래주고 힘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준 그 모든 예술이나 독서나 여행을 그냥 친한 이에게 말하듯 순서도 곡절도 이유도 없이 줄줄이 벌려놓은 게 이 책이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꽃 몇 송이를 키우는 볼품없는 꽃나무 화분이고 내가 평생 키운 꽃은 의사라는 내 생업과 밤잠을 설치면서 만들어낸 시 몇 편이 전부인데 그 꽃 화분을 이렇게 오래 편하게 살게 해준 흙과 비료와 단비 같은 물은 바로
내가 즐기는 음악 듣기고 그림 보기이고 독서이고 믿음이고 여행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2021년 봄에
마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