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사람 시인선 64
김백형 『귤』 출간
“사람들 입에 별무리 터지는 소리 자꾸만 고이게,
아빠도 아빠의 껍질을 까서 군침 도는 시를 나눠 주세요”
사람과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달콤하고 새콤한 상상력
호흡을 기록하고 육성을 기억하는 김백형 시인의 첫 시집
걷는사람 시인선 64번째 작품으로 김백형 시인의 『귤』이 출간되었다. 김백형 시인은 1991년 ‘오월문학상’ 수상 이후에 오랜 시간 침묵하다 2017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시작 활동을 재개했다. ‘12더하기시인’ 동인으로 활동하며 현재는 경기도 파주와 강원도 철원에서 청소년 인문 창작 공간 《봄울지도》를 이끌고 있다. 그런 시인의 첫 시집 『귤』은 표제작 「귤」에서 말하듯이 “몇 칸의 방”으로 나뉘어 “사람들 입에 별무리 터지는 소리 자꾸만 고이게” “군침 도는 시”로 지은 “시의 집”이다. 진지하고 끈질기게 사물을 응시하는 시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와 개인을 “새콤하고 달콤한 말들”로 풀어낸다.
이 시집에는 가족, 그리고 어울려 사는 공동체 세상에 대한 진한 애정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눈사람이라는 무명의 존재에게도 “이름부터 지어” 주는 사람이다. “사람대접도 못 받고 춥고 고프고 서러웠다고 울컥 복받쳐 우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눈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돌림자를 써서 한 가족으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장면은 시인이 가진 신실함과 동심(童心)을 한데 보여 주는 아름다운 대목이다. 시적 화자는 눈사람에게 “목도리를 둘러” 주기도 하지만, 눈사람 가족은 모두 곧 녹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눈사람이 “길의 나이테”가 되어 겨울마다 “몸 씻고 하얗게 돌아올 것”이며 “제 이름 부르는 소리 듣고 지상으로 펑펑 마음”(「하관」)을 쏟을 것이라고 믿는다.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쌓아 올린 애도는 그가 지닌 극진한 삶의 태도이자 세상을 향한 애정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가족’은 “세계와 대치하며 저 안쪽의 가족”까지 “인식하고 형상하는 꿈”이고, 그것은 “곧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기쁨을 선물한다.”(고형렬 시인, 추천사)
그는 그만의 호흡법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육성으로 그것을 기록한다. 그가 하나의 공간에 낯선 존재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은 한순간에 이질적으로 변해 버린다. 그는 대담하게 광장 한복판에 “혹등고래 한 마리”를 내려놓는다. “오대양 물을 잔뜩 채우고” “허공에 물줄기를 쏘”는 혹등고래 한 마리가 등장하는 순간, 광화문은 순식간에 “신이 난 아이들”이 “고래 등을 뛰어다니고” “세상 굽어보던 이순신 장군”이 “살 것 같다”(「광화문 바닥분수」)고 숨을 내쉬는 쾌적한 공간이 된다. 꽉 막혀 있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환상적인 상상력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읽는 이에게도 청량한 느낌을 선사하는데, 이런 시인의 호흡법은 “비현실이 지친 현실을 압도하는 장면”(김준현 시인, 해설)으로 우리에게 승화된다. 이외에도 ‘우산’을 “마음을 그대로 본”떠 만든 사물로 바라보고, 우산살 아래의 한 평 남짓의 공간을 “아담의 갈비뼈 아래 지붕마저 둥근 에덴”(「우산」)으로 인식하는가 하면, 마카롱을 “태양에 구워”진 지구로 보고, “수성 금성 목성 화성 토성 명왕성”(「마카롱」) 등의 행성으로 바라보는 등 사소한 사물을 포착하는 데에도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이 살아내고 있는 곳은 “짖지 않는 것들만”(「골목, 길 없는」) 사는 골목이다. 그가 가는 길이 “창공에 끊긴 연줄이거나 흐르다 익사하고 마는 물길”(「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이어도 시인은 그저 묵묵하게 “흘러오는 것과 흘러가는 것”(「물소리를 따라 걷다」)을 분간하며, 물소리를 따라 걷는다. 그만의 달콤하고 새콤한 상상력으로 꾸려 놓은 한 권의 시집을 보고, 김준현 시인은 “대상의 너머를 넘겨다보는 그 자리들이, 유의미와 무의미의 이분법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아름답다는 것을 그저 감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해설」)고 당부한다. 시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그저 시인의 감각과 목소리에 동참하여 따라가는 것이 “시인이 마련해 놓은 시의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