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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중용 강의

다석 중용 강의

  • 류영모 ,박영호(풀이)
  • |
  • 교양인
  • |
  • 2012-05-11 출간
  • |
  • 488페이지
  • |
  • 153 X 224 X 30 mm /688g
  • |
  • ISBN 9788991799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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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2011년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유교가 오늘에도 우리에게 소용이 있다면
그것은 유교가 고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난을 떠나
안일(安逸)을 찾으면 유교의 정신은 죽고 만다.
사람은 안일에 죽고 부귀에 썩는다.』(다석 류영모)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은 하나다!
다석 강의로 다시 읽는 중용 사상

기독교를 큰 줄기로 삼아 유교, 불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대사상가 다석(多夕) 류영모. 그는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석가·공자·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다석은 여러 동양 고전을 우리말로 옮겨 강의 자료로 썼으나 우리말로 완역한 것은 《중용(中庸)》과 《노자(老子)》뿐이었다. 《다석 중용 강의》는 다석의 직제자 박영호가 다석의 《중용》 번역과 강의를 바탕으로 삼아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이한 책이다.

다석 류영모가 YMCA 연경반 등에서 행한 고전 강의에는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석의 강의는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모아 세움으로써 사상의 일대 장관을 만들어냈다. 독창적인 언어로 대자유의 세계를 구현한 다석의 사상은 한국 지식계에 저류와도 같은 영향을 끼쳤다. 다석은 유교 경전 중에서도 특히 《중용》을 형이상학적 진리를 담은 경전으로 소중히 여겨 직접 번역하고 강의하였다. 《다석 중용 강의》는 1967~1968년에 다석 류영모가 우리말로 완역한 《중용》과 강의 내용을 40여 년 만에 그의 참제자 박영호가 쉽게 풀이한 책이다.

《다석 중용 강의》에는 공자의 유교 사상뿐만 아니라 불교, 기독교, 노장 사상을 포함한 종교 사상 전반에 대한 다석의 고유한 해석이 깊고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예수와 석가와 공자가 한자리에 모여 앉은 듯, 《중용》을 주제로 삼아 동서가 회통하는 말씀의 향연이 펼쳐진다. 다석의 해석을 통해 공자는 하느님의 아들로 나타나며, 《중용》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드러난다. 동서 사상을 두루 꿰뚫어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종합한 대각(大覺)의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막힘없는 깨달음의 경지가 독특하고 생생한 언어로 솟아난다.

다석 연구에 빛이 될 또 하나의 귀한 텍스트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달통했던 사상가 다석 류영모는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현재 다석의 사상이 담긴 책들은 다석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다석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적은 기록이거나 해설서이다. YMCA 연경반 강의의 속기록 전문을 다듬은 《다석강의》와 금욕 수도 공동체 ‘동광원’에서 한 강의를 녹취해서 푼 《다석 마지막 강의》가 다석의 육성을 생생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다석 중용 강의》를 통해 다석 류영모의 독창적 유교 해석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은 다석이 우리말로 완역한 《중용》과 그것을 토대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또 하나의 귀한 다석 사상서이다. 여기에 다석이 인정한 유일한 직제자 박영호가 쓴 풍부하고 깊이 있는 해설은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었던 다석 사상의 넓고 깊은 지평을 한층 가깝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젊은 류영모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구학문을 하다 신학문으로 기울었다. 남강 이승훈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시당 여준과 단재 신채호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류영모의 나이 20살이었다. 그 두 사람이 류영모에게 동양학을 공부하기를 충언했다. 그래서 《노자》와 불경을 비롯하여 동양학을 본격적으로 두루 섭렵하게 되었던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서울 종로 YMCA 연경반을 35년(1928∼1963년) 동안 지도하면서 성경만이 아니라 동양 고전을 두루 강의하였다. 꺼져 가는 동양 고전에 대한 면학 정신의 불씨를 살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뒤 1967∼1968년에 류영모가 빛골(光州) 무등산에 자리 잡은 김정호(목포대 교수)의 산양목장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류영모가 《중용》을 우리말로 다 옮겼다. 그 복사본이 필자에게 전달된 것은 1992년이었다. 여러 동양 고전을 발췌해서 우리말로 옮겨 강의 자료로 썼으나 우리말로 완역한 것은 《중용》과 《노자》뿐이다. 그밖에 문장이 짧은 불경인 《반야심경》, 장횡거의 《서명(西銘)》 같은 것은 여럿 있다. 류영모가 《논어》, 《맹자》, 《주역》, 《서경》 등 다른 유교 경전도 좋아하면서 굳이 《중용》만 우리말로 완역한 까닭이 무엇인가? 유교 경전에는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인데, 《중용》만은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풍성하기 때문이었다. 《중용》에는 노장(老莊)이나 불경(佛經)에 못지않은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공통되고 일치된 사상이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람은 본디 몸으로는 온전한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 성질(본능)로 살고 있다. 그 수성(獸性)으로 인하여 못 참게 먹고 싶고(貪) 못 참게 성나고(瞋) 못 참게 얼르고 싶다(痴). 문명의 발달로 살림살이는 좀 넉넉해지고 편리해졌지만 도둑질(탐), 싸움질(진), 음란질(치)이 여전한 까닭은 사람이 짐승이기 때문이다. 이 짐승의 ‘나’는 참나가 아니므로 짐승의 ‘나’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하느님으로부터 얼생명(靈性)을 받아 수성(獸性)에서 자유(해탈)로운 사람(하느님 아들) 노릇을 하자는 것이다. (‘머리말’에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통해야 한다. 그것이 중용이다.”

하느님 말씀이 곧 중용(中庸)이다
다석 류영모는 공자의 말씀이 담긴 《중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다. 《중용》을 주석한 주희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절제하는 삶의 태도를 지니는 것이 곧 ‘중용’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희의 해석과 달리 다석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곧 ‘중용’이라 하였다. 우리가 받은 본바탈(性)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다석은 제나의 감정인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하면 제나 너머의 얼나를 《중용》의 중(中)이라고 본다. 제나의 감정이 일어나도 얼나의 절제를 받으면 인격이 부드러워(和)진다는 것이다. 중(中)은 이 우주의 근본인 하느님이고 부드러운 이는 세상에 하느님이 계심을 증거하는 하느님 아들이다. 곧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가 중용의 뜻이다. 예수가 가르쳐준“(하느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오 6:10)가 바로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와 같은 뜻이다. 이것을 더 줄이면 석가의 사성제 ‘고집멸도(苦集滅道)’가 된다.

“나의 인생관은 가온 씀(中庸)이다. 절대 하느님의 말씀인 얼(성령)을 받아쓰는 것이 중용이다. 참나(얼나)는 속의 속이다. 속의 속, 곧 가온(中)인 참나(얼나)는 어디 있느냐 하면 내 맘속의 속에 있는 것 같다. 참나인 가온(中, 얼)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용(中庸)이다.”(류영모) - 길잡이 말·38쪽

기도 명상을 공자는 ‘잠잠히 아는 것(默而識之)’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얼숨 쉬는 것이다. 얼숨을 쉬는 것이 곧 중용(中庸)인 것이다. 그래서 류영모는 ‘줄곧 뚫림’이라고 옮겼다. 얼숨이 줄곧 뚫렸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의 몸생명은 목숨인데 얼생명인 말숨과 바꾸어놓을 수 있다. 공자를 논어와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생각과 말숨(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숨 속에 번데기가 되어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는 삶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생각의 실, 말숨의 실을 뽑아 생각의 집, 말숨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야 한다.”
- 9월·103쪽

사람은 물욕, 식욕, 정욕의 짐승 성질(본성)을 지닌 채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그러한 짐승의 ‘제나(自我)’는 참나가 아니므로 짐승의 ‘나’는 죽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얼생명(靈性)을 받아 참나가 되자는 것이다. 제나의 감정인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중(中)’이다. 희로애락이 일어나는 제나를 죽이고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로 솟나 참사람이 되는 것이 곧 중용이다.

희로애락이 안 일어난다고 잠잘 때에 중(中)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중(中)은 절대(하느님)에 뚫리는 것이다. 뚫리면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이 통한다. “얼(神)이 통하는 삶을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통해야 살고 막히면 죽는다.”(류영모) 하느님과 통하는 것이 중(中)이다. 희로애락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을 따지기도 하는데 미발, 이발이 상관없다. 이발을 하고도 미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중(中)이다. 제나가 살았으면서 죽은 상태에 이르는 것이 중(中)이다. “내 마음은 내가 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로애락 따위는 불태워야 한다. 곧 희로애락을 화합시켜 나가는 가운데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본디 빈 데서 이루어진 그것이 중화(中和)의 길이다. 이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류영모) - 1월·58~59쪽

공자는 하느님 아들이다
다석 류영모는 예수와 붓다를 모두 어리석은 욕망과 동물적 본능에 사로잡힌 ‘제나’를 벗어버리고 ‘얼나’로 거듭난 하느님의 아들로 보아 좋아하였다.

나는 몰라요, 내가 예수교인인지 불교인인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훌륭한 불교인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얼나를 깨를 생각해요. 그거 불교지요. 나만큼 염불을 부지런히 하는 사람도 없을지 몰라요. 그러면 예수는 깰 줄 몰랐겠습니까? 하느님 아들(얼나)이 깨지 않았을까요? 예수도 깨달은 이예요. 석가와 예수가 동시대에 살았다면 가장 가까이 만났을 것입니다. - 길잡이말·14쪽

그렇다면 예수, 석가와 함께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공자도 얼나를 깨달은 사람인가? 다석은 공자도 예수, 석가처럼 얼나로 솟난 하느님 아들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았다. 공자의 말씀과 몸가짐에서는 짐승의 냄새가 안 나고 진·선·미의 거룩한 향내가 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의 말을 알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공자는 사람으로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으면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朝聞道夕死可矣’,《논어》, 이인里仁편). 말을 알자는 인생이고 말을 듣고 끝내자는 인생이다. 한 사람의 총결산은 그 사람이 한 말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너희들이 한 말이 너희를 판단한다고 했다. 그 말이란 우리 입으로 늘 쓰는 여느 말이다. 그 사람이 쓰는 여느 말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왼통이 된다. 그 사람을 판단함에 많은 말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쓰는 한두 마디 말이 그 사람을 판단하게 한다. - 길잡이말·15쪽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를 효(孝)의 개념인 ‘부자유친(父子有親)’의 관계로 이해한 류영모는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적 인간, 즉 얼나를 깨달은 군자(君子)를 하느님인 ‘그’를 그리워하는 이라 하여 ‘그이’라고 부른다. 하늘의 얼숨(성령)이 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영원한 생명인 말씀이 되어 솟나는 것이다. 공자가 하느님 아들임을 보여주는 증거를 《중용》 이전에 《논어》에서 찾을 수 있다.

(1) “하느님께서 내게 얼나를 낳아주셨다(天生德於予).”《논어》, 술이述而편) 이보다 더 분명한 증언은 없을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예수가 한 말 가운데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얼나를 깨닫는 것입니다.”(요한 17:3, 박영호 의역) 이런 말은 스스로 얼나로 솟난 체험 없이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2) “제나를 이겨 얼나로 솟나 하느님과 아버지 아들의 관계를 돌이켜 하느님 아들 노릇을 한다(克己復禮爲仁).”(《논어》, 안연顔淵편, 박영호 의역) 공자의 말은 지극히 압축되어 있지만 매우 중요한 말이다. 짐승인 제나를 버리고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들 노릇을 하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3) “하느님 아들은 세 가지 어려워하는 것이 있다. 몸숨을 주신 하느님이 어렵고 하느님 아들이 어렵고 하느님 아들의 말씀이 어렵다(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논어》, 계씨季氏편)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와 닮았는데 더 합리적인 분류이다. 천명(遷命)과 천부(天賦)는 다르지 않다. 하느님은 사람에게는 숨쉼과 같이 절대 명령이기 때문이다. 온통이신 하느님과 낱동인 나의 관계를 밝혀 내가 제나에서 얼나로 천명하여 하느님 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 길잡이말·15~17쪽

류영모는 하느님은 너무 자주 가볍게 입에 올리면 싱거워진다고 말하였다. 공자는 하느님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삼갔다. 그렇다고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자주 말한 인(仁)과 덕(德)이 바로 하느님 아들 노릇 하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기도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는데 “잠잠히 알게 된다(默而識之).”(《논어》, 술이 편)라는 말은 기도 명상 가운데 깨닫게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공자의 유일한 스승님은 하느님이었다. 세 사람이 가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내 선생이었다고 말한 것은 스승이 없었다는 말이다. 류영모 말과 같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편지인 것이다. 류영모가 공자에 대해서 남긴 말이 있다.

사람은 제 집을 떠나서 나그네가 되어 애쓰고 고생하며 생각하는 데서 철이 나고 속알이 영근다. 공자가 섬길 임금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로 돌아다니느라고 앉은 자리가 더워질 겨를이 없었다(子席不暖)고 한다. 공자는 집에서 밥을 먹을 때가 없었다. 밤낮으로 집을 떠나 고생하면서 얻은 인간지(人間智)가 유교의 가르침이다. 유교가 오늘에도 우리에게 소용이 있다면 (그것은 유교가) 고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난을 떠나 안일(安逸)을 찾으면 유교의 정신은 죽고 만다. 사람은 안일에 죽고 부귀에 썩는다. - 길잡이말·18쪽

예수와 석가와 공자는 하나로 통한다
류영모는 평생 예수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성경을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등 인류 역사에 등장한 모든 성인들을 두루 좋아했다. 그는 성경과 함께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공부하고 일상에서 성인의 삶을 실천한 끝에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생사(生死)와 애증(愛憎), 욕망의 노예인 ‘제나(自我, ego)’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인 ‘얼나’로 솟나야(부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류영모는 바로 이것이 예수와 공자, 노자, 붓다가 인류에게 가르쳐주려 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은 하나로 통한다. 다석은 불경이나 성경 같은 형이상적인 종교의 경전만이 아니라, 《중용》, 《논어》, 《맹자》 같은 유교 경전에도 하느님 말씀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공통되고 일치된 사상이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람은 본디 몸으로는 온전한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 성질(본능)로 살고 있다. 그 수성(獸性)으로 인하여 못 참게 먹고 싶고(貪) 못 참게 성나고(瞋) 못 참게 얼르고 싶다(痴). 문명의 발달로 살림살이는 좀 넉넉해지고 편리해졌지만 도둑질(탐), 싸움질(진), 음란질(치)이 여전한 까닭은 사람이 짐승이기 때문이다. 이 짐승의 ‘나’는 참나가 아니므로 짐승의 ‘나’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하느님으로부터 얼생명(靈性)을 받아 수성(獸性)에서 자유(해탈)로운 사람(하느님 아들) 노릇을 하자는 것이다.
공자의 인(仁)은 탐·진·치의 수성에서 자유로워진 인성(人性)을 말한다. 류영모는 인(仁)을 순우리말로 ‘언’이라고 하였다. ‘언니’할 때 ‘언’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언(仁)을 해치면서 살고자 아니하며 몸나로 죽더라도 언(仁)을 이룸이 있을 뿐이다(無求生以害仁有殺身以成仁).”(《논어》, 위령공 편)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윈이 지적한 짐승들의 생존 법칙을 뒤집어엎고 사람의 생존 원칙을 밝힌 것이다. 이는 예수와 석가와 노자와 완전히 일치한다.
- 머리말·7~8쪽

“내 품의 밝은 속알이야 소리나 빛깔을 크게 함은 아니니라.” 이 시구는 하느님(上天)께서 문왕에게 이르신 말이다. 문왕이 뚫린 맘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품으신 밝은 속알(明德)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하느님께서 내게 속알(德)을 주셨다(天生德於予).”고 하였다. 이는 예수가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이신 것처럼 아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요한 5:26)와 같은 뜻의 말이다. 예수가 말한 생명이 곧 속알(德)이다. 생명이나 속알이나 다 같이 얼나를 말한 것이다. 얼나를 예수는 프뉴마(πνεμα), 석가는 다르마(Dharma)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이 품으신 얼(德)을 주시려는 것은 성색(聲色), 곧 사람의 몸나를 키우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준 얼나를 크게 하자는 뜻이다. - 33월·484~485쪽

주희가 입힌 겉옷을 벗겨내야 《중용》의 참뜻을 알 수 있다
다석은 《논어》, 《맹자》, 《서경》 등 여러 유교 경전을 두루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중용》만 유일하게 우리말로 완역하였다. 그것은 다른 유교 경전과 달리 《중용》에 형이상학적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이란 말은 원래 공자의 말이 담긴 《논어》에서 처음 나왔다. 그런데 공자가 다녀간 뒤로 공자처럼 깊은 깨달음을 이룬 이는 맹자밖에 없어 중용의 뜻을 바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더구나 ‘중용장구(中庸章句)’라는 《중용》의 주석서를 쓴 주희(朱熹)는 ‘중용’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여 공자의 사상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중용》에 담긴 형이상의 사상이 사라지고 인간사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하의 사상으로만 전해지게 된 것이다. 주희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사고(思考)를 하느님에 맞춘 공자의 《중용》을 바로 알 수도 없고 바로 풀이할 수 없었다.

주희는 ‘중용’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은《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중(中)’처럼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와 태연함에 관해서는 용기가 그 중용이다. …… 재화(財貨)의 증여와 취득에 관해서는 중용은 재물을 관대하게 쓰는 것이며, 그 초과와 부족은 방만과 인색이다. …… 명예와 불명예에서 중용은 긍지이며, 그 초과는 거만함이며 그 부족은 비굴함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라고 하였다. 얼로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얼나)의 하나됨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주희의 사서 주석서는 한자 문화권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큰 불행이었다. - 길잡이말·40쪽

류영모는 중(中)을 하느님(성령)으로 보았고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받아서 쓰는 것이 중용이라고 말했다. ‘용(庸)’은 ‘용(用)’과 통하는 글자라고 말하였다. 물고기가 물을 숨 쉬면서 살듯, 짐승이 공기를 숨 쉬면서 살듯, 사람은 얼(성령)을 숨 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짐승인 사람이 탐·진·치의 생각을 좇는 것인데 하느님을 그리는 거룩한 생각을 하는 것을 얼숨을 쉬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주희는 ‘중용’을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고 못 미치지도 않는 평상의 이치다(不傭不倚無過不及而平常之理).”라고 해석하였다. 류영모는 주희로 인해 유교가 병들었다고 말한다.

태극이 하나(절대)인데 태극이 음양인 양의(兩儀)를 낳았다고 하여 하나가 둘로 나눠졌다고 하면 이것은 무조건 인정해서는 안 된다. 태극이라고 하면 하나(전체)인데 음양이 하나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온통)에서 음양이 나왔다고 하면 모르겠으나 하나인 태극이 음양인 둘로 나뉘었다고 하면 말이 달라진다. 허공의 혼돈은 언제나 하나(절대)인 태극인데 음양인 둘이다 하고 나온 데서부터 유교가 아주 병에 걸려버렸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극의 머리와 몸을 잘라버린 것이 된다. 이래서야 어떻게 태극이 살 수 있는가?(류영모) - 길잡이말·41쪽

《다석 중용 강의》에서 박영호는 주희와 후대 유학자들이 잘못 풀이한 《중용》 33장에 담긴 형이상적 진리를 다석의 언어와 사상으로 새롭게 밝혀 보여준다. 우리말로 철학한 최초의 사상가인 다석의 《중용》 풀이는 그 자체로 다석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한 자료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에게 다석의 말은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예를 들어, 단 한 글자의 한자도 쓰지 않으려 했던 다석은 ‘1장’, ‘2장’ 할 때의 ‘장(章)’을 글월의 ‘월’로 썼다. 이 점을 고려해 저자 박영호는 《중용》 각 장의 다석 번역 글 아래에 낱말의 뜻을 친절하게 풀이해놓았다. 더불어 다석의 《중용》 강의를 바탕으로 씌어진 각 장 ‘풀이’에는 유학 사상의 흐름과 《논어》, 《맹자》, 《노자》를 비롯해 성경과 불경에 이르기까지 다석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풀이>만으로도 또 하나의 훌륭한 다석 사상 해설서라 할 수 있다.

《중용》1월
하늘 뚫린 줄(命)을 바탈(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바탈 타고난 대로 살 것을 길(道)이라 하고 (率性之謂道)
디디는(修) 길 사모칠(之) 것을 일러 가르치는 것이니라. (修道之謂敎) - 다석 번역

《중용》첫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온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천명이란 하느님의 얼생명인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말씀(뜻)으로 들린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말하지 않는다. 공자도 그래서 “하느님이 언제 말씀하시더냐(天何言哉).”(《논어》, 양화陽貨편)라고 말하였다. 사람의 말이나 뜻도 말을 들어야 알 수 있는데 상대적 존재로는 없고 상대를 초월하여 절대적 존재로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뜻)을 어떻게 듣는단 말인가. 이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수수께끼다. 이를 알기에 예수, 석가, 공자가 온갖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
일용할 양식으로 성령을 받는 것이 솔성(率性)이요 유혹(시험)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수도(修道)이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도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인 것이다. 솔성과 수도를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가르침(敎)이다. 자수(自修)가 타교(他敎)이다. 예수는 이를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위(하느님)로부터 받은 영성(靈性)이영원한 생명인 참나요 아래(어머니)로부터 받은 육신은 멸망할 생명인 거짓나다. 거짓나인 몸은 참나인 얼의 도구가 되고 사환이 되는 것만이 몸나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이것을 모르는 채 교육을 하고 있다. 류영모는 “오늘날의 이런 교육은 없어져야 한다. 기독교 학교도 제대로 못 가르치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하였다. 공자·예수·석가의 삶이 그대로 사도(師道)를 보여준 위대한 교육자이다. - 1월·44, 45, 49쪽

<책속으로 추가>
얼의 나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영생하는 것이다
“개인으로 보면 호흡을 반복하고 민족으로 보면 생사(生死)를 반복한다. 호흡을 반복하는 것이 몸이 사는 길이요 생사를 반복하는 것이 민족이 사는 길이다. 나뭇잎은 돋아났다 지지만 나무는 그대로 있다. 여기에서 변하는 것 속에 또 변하지 않는 것을 본다. 몸과 맘의 나로는 변하면서 얼의 나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영생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되면 몸이 죽어도 살아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나도 너도 언제나 행복하다. 생명의 비결은 한결(常)을 알아 그 가운데 드는 것이다.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얼나의 생명이 되어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류영모) - 14월·160~161쪽

하느님의 생명이신 얼(성령)을 찾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나는 아무래도 낮은 데 떨어진 것 같다. 저 높은 그가 계시는 곳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이 낮은 곳은 더러운 곳이요 죄악된 곳이다. 목적이 삶에 있다면 그 삶이라는 것은 하늘에 있지 결코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참뜻은 하늘에 있지 여기에 있지 않다. 참뜻은 영원한 허공이 보이지 않는 데 있지 여기 이 환상(幻像)계에 있지 않다. 땅이라는 것은 물질계를 말한다. 세상 사람은 거의 세상을 잘 다스려야 한다, 또는 땅덩어리인 나라를 잘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에 가는 길을 잘해야지 세상이나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기어코 헛일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늘에 먼저 해야 할 것을 땅에 먼저 한다. 사는 목적을 하늘에 두지 않고 이 세상에 둔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가질 목적이 없다. 이 땅에서 참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참이지 온전한 참이 아니다.”(류영모) - 15월·175쪽

어떻게든지 바로 살겠다는 ‘그이(君子)’가 되고 싶다
“나더러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나도 그이(君子)가 되고 싶다고 할 수 있다. 기왕에 생명을 타고나온 이상에는 어떻게든지 바로 살겠다는 ‘그이(君子)’라는 소리를 나는 듣고 싶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의 그이가 있다. 나라는 사람에게 두어 사람이라도 ‘그이는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사람이다. 나쁜 감정이 없어.’라고 하면서 나를 그이라고 하여준다면 나는 여부없이 그 말을 받겠다. 공자, 증자도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이가 되겠다는 사람이다.”(류영모) - 17월·209쪽

모든 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씨알을 위함이 곧 하느님 위함이다. 예수는 ‘여기 소자 가운데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백성을 모른다고 하면서 하느님만 섬긴다 함도 하느님을 모른다 하고 백성만 위한다 함도 다 거짓이다. 이 시대가 민주주의 시대가 되어서 처음부터 마음이 민주(民主)가 되어야 한다. 씨알이 나라의 임자가 된 것은 천의(天意)요 천도이다. 모든 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류영모) - 28월·406쪽

생사를 초월하는 그것이 자유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 그것은 밑 빠진 항아리와 같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죽음이요 손실뿐이다. 욕(欲)은 손(損)이다. 욕(欲)을 버리면 의(義)롭고 욕을 가지면 해(害)롭다. 정말 욕심이 없으면 생사(生死)도 넘어설 수 있다. 정말 욕심이 없으면 죽어도 싫어하지 않고 살아도 좋아하지 않는다. 생사를 초월하면 그것이 자유요, 진리요, 사랑이요, 영원이요, 믿음이다. 그대의 생명을 참으로 사랑하라. 황금을 아끼듯이 보석을 아끼듯이 그대의 영원한 생명(성령의 나, 불성의 나, 지성의 나)을 사랑하라.”(류영모) - 30월·437쪽

몸의 생명은 끊어지면서 얼의 생명줄은 줄곧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 영원한 생명줄이 아버지(하느님) 계시는 위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드리워져 있다. 영원한 그리스도란 이 한 생명줄이다. 불연속의 연속이란 말이 있지만 생명이란 불연속의 연속이다. 몸의 생명은 끊어지면서 얼의 생명줄은 줄곧 이어가는 것이다. 이 생명줄의 실이란 곧 말씀(로고스)이다. 생명줄로 나온 실이 말씀이다.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들이 수백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놓은 걸 씹어봐요. 이렇게 말하면 종교 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귀일(歸一)이라야지 통일은 되는 게 아니다.”(류영모) - 32월·459쪽


목차


머리말
길잡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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