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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 복거일
  • |
  • 북앤피플
  • |
  • 2012-10-20 출간
  • |
  • 534페이지
  • |
  • 152 X 223 mm
  • |
  • ISBN 978899787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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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자유주의자 복거일의 새로운 안티 테제: ‘친일 행위의 평가와 단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오랜 자유주의자로 살아온 작가 복거일 씨가 우리 사회의 “순수하고 단순한 진실”을 믿는 민중주의·민족주의적 역사관의 입장들을 겨냥해 쓴, 그리고 보다 거시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동안 벼르고 있던 사유와 연구의 깊이를 쏟아놓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소 경직된 역사관에 일침을 놓는 사회 비평서이자, 일제 식민지 시대의 총체적인 우리 사회 정황을 많은 양(尾註만 72쪽임)의 사료들을 근거로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고 깊게 성찰해보려는 저자의 의지가 깔린 (일종의 재야 입장의) 역사 비평서이다. 내용의 초점은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고 있듯이, (자칫 민감하고 뜨거운 논쟁의 불씨가 될 만한) ‘우리 시대의 친일 문제’에 맞춰져 있다.

친일 행위의 단죄,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그러한 이 책은 저자 「서언」 첫머리에서 그 집필 목적과 의의와 문제의식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서 그것은 여러 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낳는다. 그렇게 풀기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특히 어려운 것은 식민 통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지배를 받은 사회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사회는 없었다. 우리 경우, 그런 협력 행위들이 있은 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고, 친일 행위들과 그런 행위들을 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끊임없이 덧나는 상처처럼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의 처벌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은 여전히 높다. 그들은 그런 처벌이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데 긴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런 주장은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물음조차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런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해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답변을 마련해보려는 생각에서 나왔다.”(9∼10쪽)

“그들을 변호하게 된 것은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 터이다.”

또한, 복거일 씨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 혹은 스스로를 부추기게 된 책무에 대해서 자신의 세계관(역사관)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서문」의 말을 잇는다:

“이 글을 쓰면서, 특히 힘든 처지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던 사람들에 관한 자료들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이제 자신들을 변호할 길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일종의 책무를 지녔다는 것을 점점 절실하게 느꼈다. 산 사람들과 마주하면, 죽은 사람들은 늘 소수다. 『소수를 위한 변명』(문학과지성사, 1997)에서 나는 ‘개인은 궁극적 소수’라는 사실을 지적했었다. 만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죽은 자는 더 궁극적인 소수다.’ 산 사람들과는 달리, 죽은 사람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홀로 누워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후대 사람들의 선고를 받는다.
/ 그들을 변호하게 된 것은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 터이다. 세상이 버린 사람들을 작가는 거둔다. 그리고 그렇게 버림받은 자들에 관해서 세상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들을 들려준다. 그것이 그의 책무이다. 그는 때로 자신의 얘기를 예술적 진실이라 부른다. 예술적 진실은 윤리적 판단이라는 면이 역사학적 판단이라는 면을 가를 때 만들어지는 선이다. 때로 솟구치고 때로 추락하는 그 선이 드러낸 뜻밖의 모습들을 되도록 정직하게 바라보려 애썼다.”(10쪽)

식민지 시대 조선인 인구는 두 배로 늘었다

이러한 복거일 씨는 이 적지 않은 양의 저술에서 일본의 식민 통치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근대 역사에 대한 평가를 ‘계량적’ 연구로 접근하고자 한다. 즉, 그러한 연구 방법론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살았나?”(11쪽)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저자 복거일 씨가 그 답을 찾는 과정은 특히 제11장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1장은 이 책 전체 분량의 1/3에 해당할 정도로 이 저술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계량적 연구 방법론’은 당시의 인구 추세를 살피는 데 있다. 저자에 의하면, “어떤 통치의 성격과 효율은 궁극적으로 인구 추세에 반영”(11쪽)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식민 통치에선 그런 인구 추세의 상관관계가 더욱 긴밀하니,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역사가 잘 보여준 것처럼, 정복자들이 약탈적이거나 추출적extractive 정책을 펴면, 원주민들의 인구는 빠르게 줄어든다. 통치의 영향을 따질 때 흔히 고려되는 요소들만이 아니라 비제도적 차별과 식민자들이 퍼뜨린 질병들처럼 놓치기 쉬운 요인들까지, 심지어 식민지화의 심리적 충격과 같은 요인들까지, 인구 추세엔 반영된다.”(11쪽)

그런데, 복거일 씨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식민지 시기 조선인 인구는 1910년의 13,1128,780명에서 1942년의 25,525,409명으로 94.4% 늘었다”(12쪽)는 것이다. 즉, “혹독한 식민 통치를 받은 조선 사람들이 보인 이처럼 두드러진 인구 증가는 그 자체로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며, 깊은 조사와 설득력 있는 설명을 받아야 마땅하다”(13쪽)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실, 기본적으로 슬픈 근대사를 거쳐오면서, 즉 일본으로부터의 피식민지 근대사를 살아온 (누구나 민족주의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동시대의 우리들에게는 무척 민감한 사안이다.

왜냐하면, 복거일 씨는 “어쨌든, 이런 인구 추세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은, 식민 통치의 본질적 제약들과 폐해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잘살았다는 것이다”(13쪽)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덧붙인다: “그들은 조선인들은 조선조 통치 아래에서보다 훨씬 낫게 살았을 뿐 아니라, 물질적 조건들만 따진다면, 같은 시기의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실질적으로 못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이런 결론은 물론 우리 사회의 통념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그러나 그것을 피할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13∼14쪽)

그러면서 복거일 씨는 그러한 연구 방법론의 근거를 ‘기구 가설institution hypothesis’(“사회 기구들의 성격과 효율이 한 사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발전에서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는 주장” 14쪽 )에서 찾는다. 복거일 씨에 의하면, “이 가설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들이었던 나라들의 경험에 비추어 증명되었고, 자연히, 우리 식민지 경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14∼15쪽)는 것이다. 결국, 그 기구 가설을 통해 우리 근대사를 살피면, 식민지 시절, 대만과 조선에 세워진 사회 기구들은 일본이 “정착자 사회” 방식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가지 않은) 대만과 조선의 산업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복거일 씨는 추론한다.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은 없다”

또한, 이 책 「서문」 말미에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 즉,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은 없다”(18쪽)는 명제를 모토로 한 복거일 씨의 이 저술은 ‘친일파’라는 용어 및 개념에서부터, 그 용어를 쓰게 된 당시 우리 근대사의 구체적인 사건 및 배경을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재고함으로써, 기존의 통념만큼 ‘친일파’를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그 문제에 대해서 (그 예로) 복거일 씨는 이렇게 시작한다: “을미사변으로 집권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쁜 사람들도 많았지만, 당시 명망이 높던 사람들과 후세의 역사가들이 애국자라고 판정한 사람들도 드물지 않았다.

그 사람들 모두를 친일파라고 정의하면, 친일파의 뜻이 어쩔 수 없이 느슨해지고 모호해진다”(25쪽) 또한, 흔히 쇄국주의자로 알려진 흥선대원군이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당시 왕비였던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본 세력과 손잡았던 경우에선 그 사건을 범죄로 규정짓고, “친일 행위라는 개념들에는 법적 측면과 함께 도덕적 측면도 있다는 사실과 그 둘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친일 행위를 정의할 때, 법적 기준은 당연히 중심적 기준이 된다. 그러나 도덕적 기준은 판단하기가 훨씬 어렵다”(26쪽)고 역설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친일 행위를 했다?

그런가 하면, 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은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일본의 통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대목에선,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만해 한용훈 선생의 행적을 예를 들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의 핵심적인 사항인 불교 승려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만해 한용훈 선생 융희 4년(1910년)에 ‘중추원(中樞院) 의장 김윤식(金允植) 각하’라고 수신자를 밝힌 『중추원 헌의서(獻議書)』를 냈다. 이어 그해 9월에 ‘통감(統監)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전(殿)’이라고 수신자를 밝힌 『통감부 건백서(建白書)』를 냈다.

여기서 우리는 만해가 낸 문서의 명칭이 ‘헌의서’에서 ‘건백서’로 바뀐 점에 주목해야 한다. ‘헌의’는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뢴다’는 뜻을 지녔지만, ‘건백’은 ‘임금이나 조정에 의견을 아뢴다’는 뜻을 지녔다. 만해가 통감이나 통감부를 임금이나 조정으로 여겼다는 얘기다”(29쪽)라고 쓰고 있다. 만해 선생이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건백서를 낸 결정적인 이유는, 끝내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한 당시 조선조 정부에 대해 절망하고 체념한 데 있으며,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해선 우려와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복거일 씨는 이 책에서 쓰고 있다.

그러면서 복거일 씨는 만해 선생의 이 ‘건백서’에 대해, “요즈음 무슨 조치가 실효를 거두려면 ‘대통령 직속 기구’를 통해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흔히 나오듯, 승려 금혼 해제가 ‘통감부의 명령’을 통해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나서 흥미롭다. 1910년 9월이면 한일합방조약이 말 그대로 ‘잉크도 마르지 않은 때’였다. 그런 때에 그렇게 훌륭한 민족 지도자가 그런 건의를 일본의 식민 통치 책임자에게 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의 현실 인식을 충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낸다”(30쪽)라고 한다.

전봉준·흥선대원군·일본 천우협(天佑俠)의 우호적 트라이앵글!

또한, ‘노비 제도’를 없앴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혁명적 사건이었던 ‘갑오경장’은 5백여 년의 조선조 역사에서 이념과 범위와 효과에서 그만한 것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갑오경장은 일본이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복거일 씨의 주장에 있다. 자칫 큰 논쟁의 여지가 있는 또 하나의 복거일 씨 주장은, ‘동학란’의 배경에 대한 정치적 관계에 있다. 복거일 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동학란의 성격과 의의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분석과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학란이 조선조 조정의 권력 투쟁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들이 분명히 있고, 그 점에 대한 역사가들의 고증도 있었다. 전봉준(全琫準)이 여러 해 동안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雲峴宮)에 드나들면서 대원군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널리 알려졌다. 대원군이 동학란을 일으키도록 전봉준을 사주하고 지원했다는 증거들도 적잖다. 그리고 그런 공작에서 대원군과 일본이 협력했음을 가리키는 증거들도 여럿이다.”(41쪽)

덧붙여, “전봉준이 일본인들과 만났고 그들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은 것도 거의 확실하다. ‘천우협(天佑俠)’이란 일본 국수주의 단체가 동학란 때 상당히 활발하게 움직인 것은 여러 가지 자료들로 증명되었다”(43쪽)라고 역설하면서, 당시 일반적인 조선인들이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에 대해 끌렸을 거라는 추론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의 편향에서 벗어나 중립적 관점에서 갑오경장을 살피면, 그것의 혁명적 조치들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호감을 품게 되었으리라는 사실이 이내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들은 일본이 조선을 위해서 추진하겠다고 내건 정책들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품었을 터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을 터이다. 해방된 노비들, 사회적 천대와 경제적 차별을 받았던 천민들, 재혼을 할 수 있게 된 여인들, 문반에 비해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무반들, 이전엔 도성에 드나들기도 어려웠던 불교 승녀들---이들 계층들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일본에 호감을 품었을 터이다.”(46쪽)

덧붙여, 복거일 씨는 당시 지식인들조차 일본 쪽으로 기울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에 대해 큰 호감을 갖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조선조가 공식적으로 청(淸)의 속국이었고 실질적으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이 청의 속국이 된 것은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였지만, 양차의 호란 바로 뒤의 시기를 빼고는 청이 직접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았다. 서양 세력이 들어오고, 청의 조선에 대한 지배적 위치가 위협을 받자,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당연히 그런 사정에 대해 울분을 느꼈다.”(53쪽)

“어디까지가 강제된 행위들이고 어디서부터 자발적 친일 행위인가?”

또한 복거일 씨는,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무능한 조선 정부의 책임과 (위의 주장대로) 조선인들의 일본 편향뿐만 아니라, 당시 식민지 경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제국주의 열강들은 대부분 조선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동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 통치를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는 데서 찾는다. 그렇듯, 대내외적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슬픈 근대사에서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세기 넘게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당연하고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상황에서의 친일 행위에 대해 복거일 씨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군국주의, 천황 숭배, 조선 역사의 왜곡, 조선어의 말살과 일본어 강요, 창씨 개명, 강제 징집과 징용, 각종 헌금들의 모금과 같은 일본의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찬양하거나 보급한 행위들은 특히 중대한 친일 행위로 여겨진다.

/ 이런 행위들은 물론 우리에게 혐오스럽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에 대해 판결을 내릴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이루어진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일본의 식민 통치는 공식적이었고, 실질적이었고, 혹독했고, 길었다.

그리고 역대 조선 총독들이 모두 일본군 현역 장군들이었다는 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일본의 지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아주 작은 것들도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총독부는 어느 때나 필요한 만큼 친일파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는 연사들이 필요하면, 조선 총독부는 조선 지식인들을 징집해서 그런 연사들로 만들었고, 조선인 순사들이나 헌병들이 필요하면, 그들도 어렵지 않게 만들어냈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인 1908년에 일본이 조선인 헌병 보조원을 성공적으로 모집했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어쩌다 한두 사람은 큰 값을 치르고서 그런 강요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 그런 행위들을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징집되어 그 일들에 동원되었을 것이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강제된 행위들이고 어디서부터 자발적 친일 행위인가? (중략) 사정이 그러했는데, 지금 우리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조선 사람들에 대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모두 용감한 달걀이 되어 바위처럼 버티고 선 조선 총독부의 권력에 부딪히라고?

/ 일본의 식민 통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자, 조선 사람들은 그저 연명하기 위해서도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들을 해야만 되었다. 예컨대, 글을 써야 먹고 살 수 있었던 문인들은 때때로 조선 총독부의 식민 통치 정책을 찬양하거나 돕는 글들을 써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발표할 지면을 얻을 수 없었다. 절필할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을 빼놓으면, 당시엔 모든 문인들이 ‘잠재적 친일 문인’이었다. 올곧은 작가로 여겨져 작품 활동에 비해 무척 높은 평가를 받은 김정한(金廷漢) 선생이 실은 친일 문학이라고 분류될 수밖에 없는 작품을 적어도 한 편은 썼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 이런 사정은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들에 대한 비난이 안은 논리적 문제를 또렷이 드러낸다.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선 자리는 논리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곳이다.

/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선 조선인들이 그들의 친일 행위들에 대해 비난을 받는다면, 그런 비난엔 그들이 친일 행위들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만일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그들에 대한 비난은 물론 부당하다. 어떤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을 때에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이 있다.

/ 그러나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산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가정은 일본의 식민 통치가 그리 엄중하고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판단을 전제로 삼는다. 조선인들이 마음만 바로 먹었으면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조선 총독부의 협조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다는데, 어떻게 일본의 식민 통치가 엄중하고 가혹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따라서 친일 행위들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변호라는 셈이다. 이런 역설은 그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문제를 안았음을 가리킨다. 친일 행위와 친일파에 관한 논의가 보다 생산적이 되려면, 어려운 처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조심스럽게 진행해서 그런 역설을 피해 가는 것이 긴요하다.

/ 위에서 살핀 것처럼, 식민 통치 시기의 친일 행위를 정의하기는 쉽지도 간단치도 않다. (중략) 그래서 지금 별다른 문제없이 친일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적다. 그런 행위들로 이내 꼽힐 수 있는 것들은 아마도 독립 운동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과 여자들을 속이거나 납치해서 ‘종군 위안부’들로 만든 행위 정도일 것이다.”(84∼92쪽)


목차


재판 서문
서언

제1장 친일 문제에 관련된 가정들
제2장 친일파의 정의
제3장 조선조 말기의 사회 상황
제4장 조선조 말기의 국제 정세
제5장 식민 통치 아래에서의 친일 행위
제6장 친일파의 판별
제7장 친일파 처벌의 법적ㆍ도덕적 근거
제8장 친일파 청산의 효용
제9장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족행위특별조서위원회
제10장 프랑스의 경우
제11장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평가
제12장 소급적 평가의 위험
제13장 친일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
제14장 과거는 운명 자체다
제15장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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