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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베스트도서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외



지금 우리는

지금 이 나라는 경제, 정치,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언제 가시화할지 모를 잠재적 위기다. 그로 인해 청년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최저임금의 과격한 인상은 자영업자와 영세상공인의 존립을 위협하고 서민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정부는 이 모든 결과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악성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실태와 특질을 알지 못하는 아마추어 집권 세력이 분배 지향과 규제 일변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한 이래 한국의 자유 시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변고를 경험했다. 지금도 그 일들을 회고하면 정신이 혼미하다.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진 일련의 정치과정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가가 권력을 잡을 경우 얼마나 큰 혼란을 자초하는지를 교과서적으로 잘 보여 주었다. 이것은 앞으로 몇 년이고 이어질 엄청난 갈등과 그에 따른 파국을 예견하고 있다.
사회는 어떠한가. 그야말로 이 나라는 거짓말 천지이다. 위증죄와 무고죄가 일본의 천 배나 된다. 각종 보험사기가 미국보다 백배나 난무하고 있다. 정부지원금의 3분의 1이 사기로 줄줄 새고 있다. 민사소송의 인구당 건수는 세계 최고이다. 한국인의 숨결엔 거짓말이 배여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숨으로 동의 할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 그에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에 관대한 타락한 정신문화는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정체의 늪으로 이끌어 간다. 2019년의 한국은 여전히 국민 모두에게 우울한 나날이다.

거짓말하는 개인, 거짓말하는 사회, 거짓말하는 국가

어느 사회가 거짓말에 관대하다면 그 사회 저변에는 그에 상응하는 집단 심성이 불변의 추세로 흐르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물질주의다. 돈과 지위야말로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는 가치관, 돈과 지위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행동 원리, 이런 것이 물질주의다. 물질주의 문화는 거짓말에 대해 관대하다. 한국 사회가 유난히도 물질주의적인 것은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여러 지표로 지적되고 있는 바이다.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야에서 물질주의 근원을 추구해 들어가면 한국의 역사와 함께 오래된 샤머니즘을 만나게 된다.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선과 악을 심판하는 절대자 신은 없다. 샤머니즘의 현실은 벌거벗은 물질주의와 육체주의이다. 샤머니즘의 집단은 종족이거나 부족이다. 종족은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 객관적 논변이 허용되지 않은 불변의 적대 감정이다. 여기선 거짓말이 선으로서 장려된다. 거짓말은 종족을 결속하는 토템으로 역할을 한다.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크게 말해 이러한 샤머니즘에 긴박되어 있다.
이 같은 한국 사회의 형질이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관계에 이르면 더없이 거센 종족주의로 분출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은 원수의 나라였다. 반일 종족주의의 저변에는 그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적대 감정이 깔려 있다. 중국에 대한 적대 감정은 역사적으로 희박하였다. 그래서 반중 종족주의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오히려 중국에 대해서는 조선왕조가 그러했듯이 사대주의의 자세를 취하는 수가 많다. 중국이 고약한 말을 해도 분노하지 않고, 고약한 짓을 해도 참고 지내기 일쑤이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범주가 없다. 두 이웃 나라를 대하는 태도도 그 미숙한 세계관으로 인하여 현저히 불균형하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종족주의로 고쳐 부름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1960년대부터 서서히 성숙하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폭발하였다. 자율의 시대에 이르러 물질주의가 만개한 것과 공통의 추세였다. 반일 종족주의에 편승하여 한국의 역사학계는 수많은 거짓말을 지어냈다. 이 책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반일 종족주의』가 고발하는 몇 가지는 그 모든 거짓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말은 다시 반일 종족주의를 강화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정신문화는 그러한 악순환이었다. 그 사이 한국의 정신문화는 점점 낮은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거대한 문화 진영에 돌진하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된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이다. 그래서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다. 이웃 일본을 세세(歲歲)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감정. 온갖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것은 이 같은 집단 심성에 의해서다. 바로 반일 종족주의 때문이다. 이를 그냥 안고선 이 나라의 선진화는 불가능하다. 선진화는커녕 후진화할 것이다. 거짓말의 문화, 정치, 학문, 재판은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러한 위기의식으로 이 책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학자 6명이 온몸으로 반일 종족주의, 그 거대한 문화 권력의 진영에 돌진하는 것으로 집대성되었다.

북 소믈리에

한국의 반일주의란 거짓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불편하며 심지어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 등 저자 일동은 어디까지나 연구에 의해 검증된 사실에 입각해서 기존 통념을 비판하고 자신의 주장을 폈다. 이 책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은 이 책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현 한일 대립 상황에서 일본을 편드는 것이라 비난할지 모르나, 저자들은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연구자로서 학자적 양심에 따라 이 책을 썼음을 자부한다. 저자들은 입장을 달리하는 이들의 이 책에 대한 학술적 비판을 환영하며 이 책에 대한 한국 지식사회의 진지한 검토를 바라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통념을 정면 부정

책은 프롤로그와 본문 3부 및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1~3부가 각기 11개 장, 9개 장, 5개 장, 도합 25개장이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더해 총 27개장이다.
「프롤로그」에서는 대한민국이 거짓말의 나라가 되었음을 통박(痛駁)하고, 나라가 파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이 책을 읽을 것을 당부한다.

1부 「종족주의의 기억」은 한국인이 일본의 식민 지배와 그 후의 한일협정을 어떻게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과 같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이나 전시 노무동원 때 조선인 토지를 빼앗고 조선인을 마구 학살했다고 믿고, 쌀이 수출된 것을 쌀을 빼앗긴 걸로 간주하며, 모집과 관알선 등 기본적으로 자의로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건너간 것을 강제로 동원되어 노예처럼 사역당한 걸로 본다. 아울러 매국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때문에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제대로 배상을 못 받았다고 기억한다. 이런 기억이 반일주의가 자라나는 토양이 되었다.

2부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은 반일 종족주의의 형성과 확산에 관한 것으로, 백두산 신화, 독도 문제와 망국 책임 문제, 과거사 청산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백두산은 남북한 모두에게 민족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백두혈통’으로 상징되는 북한 신정체제의 토대라는 것,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독도를 마치 조선왕조가 영유해 온 것처럼 강변하는 것,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구 총독부 청사를 철거해 대한민국 역사를 지운 것, 반민족행위자 처벌 문제를 친일파 처벌로 바꿔치기해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한 것, 반일 종족주의의란 민족 단계에 이르지 못한 종족 수준의 대외 적대감정이라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는 반일 종족주의의 강력한 근거지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파헤친 것이다. 정대협 등 한국의 위안부 운동가가 조장한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된 성노예’설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조선왕조의 신분적 성 지배제도로서 기생제가 일제에 의해 공창제로 재편된 바 그를 전시기에 일본군이 군 위안소로 활용한 게 일본군 위안부 제도라는 것을 밝혔다. ‘강제연행’과 ‘성노예’는 사실적 근거가 없는데, 그럼에도 정대협 등 위안부 운동가의 선전 선동 때문에 위안부 문제가 증폭되어 한일 간 외교 관계가 파탄 위기에 직면했음도 밝혔다.

「에필로그」에선, 샤머니즘과 물질주의, 집단주의에 포획된 한국의 정신문화가 종족주의를 낳았고, 이는 대외관계에선 인접국 중 일본에 대해서만 적대적인 반일 종족주의로 폭발하였는데, 국민 다수가 이런 무녀의 진혼굿에 사로잡혀서는 대한민국은 쇠망할 수밖에 없다는 강력한 경고를 발하였다.

예를 들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는,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을 할 때 주재소장이 그에 항의하는 조선 농민을 즉결 처분으로 총살했다거나 일제말 일본의 비행장 건설에 조선인을 동원하곤 공사가 끝나자 1천명의 조선인 노무자를 학살한 것으로 서술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책 1장). 소설이라고 아무 이야기나 지어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아래 이미지 사진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헌병이나 경찰, 관리가 조선 소녀를 강제로 끌어가 위안부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원(元) 위안부 중 소수의 증언만 있을 뿐이며, 다수는 모집원의 사기성 취업 권유나 부모, 친척, 친지에 의한 인신매매로 위안부로 간 것이었다(책 23장, 25장).

노무자 역시 강제동원(징용)되어 임금도 못 받고 노예처럼 혹사당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며, 그 이미지에 따른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전국 도처에 세워지고 있으나,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무자의 사진이라 하여 초등학교 6학년 사회과 교과서에 실은 사진은 실은 1920년대 일본 홋카이도 개척 토목현장에서 노예처럼 사역된 일본인들의 사진이었다. 일본인 노동자 인물을 모델로 하여 서울 용산역 앞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우고 있다. 가짜 사진으로 일본의 강제노무동원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책 5장).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의 수많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에 관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지만, 한국사 학자들과 교육자들은 반일 종족주의의 필터를 통해 반일 종족주의에 부합하는 사실들 혹은 거짓들로 교과서를 쓰고 국민의 집단 기억을 재생산해 왔다. 이제 이 기억에 메스를 댈 때가 되었다.

일본과의 갈등을 증폭시켜 한일 우호 협력 관계를 파탄 내다

이처럼 잘못된 기억으로 현재 한일 간에는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이 조장?격화되고 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옛 일본제철(주)를 승계한 일본 기업 신일본주금(주)에 해방 전 조선인 노무자를 징용한 데 대하여 1인당 1억 원씩의 위자료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양국 간, 양국 국민 간 일체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맞섬으로써 양국 간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대법관들이 해방 전의 한일 간 노동이동의 실태 및 이승만 정부 이래의 한일 청구권 회담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배상하라고 명령한, 수습 불가능한 대형 사고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프롤로그 및 10장). 청구권 회담의 의제는 식민지 지배의 피해 배상이 아니라 한일 간 채권 채무, 청구권의 상호 조정이었으며, 어렵사리 13년 만에 타결을 지어 그 후 50년간 협정을 준수해 왔는데, 느닷없이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배상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니, 이는 청구권 협정을 폐기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가히 평지풍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문재인 정부는 전임 박근혜 정부가 일본 아베 정부와 맺었던 위안부 협정을 2018년 12월 사실상 폐기함으로써 한일 갈등을 조정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그 운영을 관리 감독한 점에서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사과하고 위로금을 지급하려 했음에도, 한국의 위안부 운동단체가 막무가내로 그를 거부했고, 문재인 정부는 전임 정부의 합의까지도 뒤집어 폐기했다. 이로써 위안부 문제는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던 해방 후 한국군 위안부와 민간 위안부 및 미국군 위안부 문제에는 눈을 감고, 오직 일본군 위안부만 문제 삼아 온 위안부 운동단체의 행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21~23장 및 25장).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그 후의 한일 관계에 대한 오늘날 한국인의 기성 통념을 이 책에선 정면 부정한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이 학교 교과과정이나 여러 영화, 각종 역사서적에서 접한 대로 “일본이 식민 지배 35년간 한국인을 억압, 착취, 수탈, 학대했으며, 그럼에도 그 후 일본은 그를 반성, 사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통념이 사실에 근거한 게 아님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가끔은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벼야 할 때가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의 세상에서
평등을 외치는 당신을 위한 안내서

혐오와 차별은 잡초처럼 자란다.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온 사회에 무성해진다. 사람들은 때로 아주 작은 차별은 무시해도 되고, 심지어 다수에게 유리한 차별은 합리적인 차등이라고 이야기하며,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나 시정조치를 역차별이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혐오주의자나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바로 나, 당신, 우리일 수 있다. 평범한 우리 모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고 말하는 도발적인 책 『선량한 차별주의가』가 출간되었다. 저자인 김지혜 교수(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는 차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현장활동가이자, 통계학·사회복지학·법학을 넘나드는 통합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국내의 열악한 혐오?차별 문제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전념해온 연구자다. 현장과 밀착한 인권·혐오문제 연구를 진행해온 연구자답게 이번 책에서 쉽고 재미있는 대중적 글쓰기를 선보인다. 인간 심리에 대한 국내외의 최신 연구, 현장에서 기록한 생생한 사례, 학생들과 꾸준히 진행해온 토론수업과 전문가들의 학술포럼에서의 다양한 논쟁을 버무려 우리 일상에 숨겨진 혐오와 차별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은밀하고 사소하며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선량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차별과 혐오의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이 책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조직해가자고 제안한다. 차별을 당하면서도 작은 문제제기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들부터 소위 프로불편러까지, 차별과 혐오의 시대에 지친 현대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 모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입니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면 시간이 더 걸리니까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장애인의 시외버스 탑승에 대한 토의 수업에서 한 학생이 한 말이다. 일부러 장애인을 차별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 어떻게 장애인이 돈을 더 내야 공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질서 속에서 바라보면 버스의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장애인의 결함이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다. 애초에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속도와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이미 편향된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차별을 보지 못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이유를 1부에서 중점적으로 다룬다. 먼저 모든 사람은 가진 조건이 다르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리 공정하게 판단하려 한들 편향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차별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특권은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그때 발견할 수 있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외버스에는 휠체어 리프트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차표를 사도 버스를 탈 수가 없다. 타인은 갖지 못하고 나는 가진 어떤 것, 여기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특권이다.
그에 더해 저자는 우리가 때에 따라 특권을 가진 다수자가 되기도 하고, 차별받는 소수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 개인이 어떤 점에서 소수자라고 해서 늘 차별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런 교차성은 차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다. 최근 예멘 난민 수용 논란이 일었을 때, 예멘의 성차별적 문화를 이유로 더 거세게 난민 수용에 반대한 이들이 ‘소수자’인 여성이었다는 점을 예로 들며, 차별에 대한 논의를 더욱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조차 차별적인 질서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불평등을 유지시키면서, 차별은 고착되고 구조의 일부가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의 날카롭고 다각적인 문제제기를 따라가다보면, 아무리 선량한 시민이라도 차별을 전혀 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우리 사회의 차별감수성은 10~20년 전에 비하면 놀랄 만큼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은 차별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물으면 어떤 차별은 합리적이라고, 또 어떤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부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차별이 지워지거나 ‘공정함’으로 둔갑되는 메커니즘을 살핀다.
예를 들어보자. 코미디 프로그램의 ‘바보’ 캐릭터가 장애인 비하라는 문제제기를 하자 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냐고 말한다. 학생 성적별로 수준에 맞춘 교육을 제공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학급을 우열반으로 나누는 것이 학생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노키즈존’ 논란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사업주에게는 손님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저자는 차별에 대한 이런 논란들을 차근차근 해부하며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인간 심리와 사회현상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가 자연스럽게 평등과 차별을 탐구해볼 수 있게 한다. 애초에 ‘바보’ 캐릭터는 왜 웃긴지, 비하적 농담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지 되묻는다. 우열반 편성처럼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한다는 ‘능력주의’ 원칙은 얼핏 객관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획일적인 평가기준으로 ‘승자’가 모든 기회를 독식하고 패자는 박탈감과 배제를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노키즈존’이 사업주의 정당한 권리라면 ‘노장애인존’도 괜찮은가? 사업주가 손님에게 예의를 지켜달라고 요구해도 된다고 해서 어떤 손님이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특정 ‘집단’ 전체를 거부해도 괜찮은 걸까? 토론 수업에 참여한 듯 생생한 질문과 대답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도 몰랐던 차별적인 생각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울어진 세상에서
평등을 외치다!

1부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살피고 2부에서 차별이 숨겨지는 작동원리를 짚었다면, 3부에서는 이러한 차별과 혐오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살핀다. 각종 논쟁과 실험을 풍부하게 제시하며,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한걸음의 대안부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폭넓게 살핀다. 집회·시위·시민불복종처럼 차별에 도전하는 노력들이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지는 충돌과 긴장을 다룸으로써, 우리 사회가 소수자의 목소리에 어떻게 귀를 기울여야 할지 생각해본다. 나아가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 논쟁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보편적이면서도 다양한 평등의 원칙은 가능한지, 그 원칙에 어떻게 합의할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의 의미를 평등을 실현하는 해법의 하나로서 짚는다.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 노예제 시대에는 노예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는 시대에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우리의 생각은 시야에 갇힌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 성찰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내 시야가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를 제공한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이 남기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