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담기 close

장바구니에 상품을 담았습니다.

기타 잇키

기타 잇키

  • 마쓰모토 겐이치
  • |
  • 교양인
  • |
  • 2010-07-09 출간
  • |
  • 1219페이지
  • |
  • 235 X 235 X 60 mm /2088g
  • |
  • ISBN 9788991799516
판매가

40,000원

즉시할인가

36,000

카드할인

0원(즉시할인 0%)

적립금

2,000원 적립(5%적립)

배송비

무료배송

(제주/도서산간 배송 추가비용:3,000원)

추가혜택

네이버페이 무조건 1%적립+ 추가 1%적립

수량
+ -
총주문금액
36,000

이 상품은 품절된 상품입니다

※ 스프링제본 상품은 반품/교환/환불이 불가능하므로 신중하게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판사서평

일본 군국주의의 배후로 낙인찍혀
역사의 무덤에 매장당한 혁명가
기타 잇키의 진짜 얼굴을 만난다!


유배자들의 섬 사도(佐渡)에서 태어나 자유 민권 시대의 공기를 들이마신 변경인. 사회주의, 아나키즘, 민주주의, 국가주의, 천황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낭만주의 등 온갖 사상의 용광로에서 자신의 이념을 정련한 조숙한 청년. 스스로 ‘동양의 루소’라 칭했던 광기의 천재.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으로 나아갔던 사상가. 공화주의 혁명을 꿈꾸며 바다 건너 중국 혁명에 뛰어든 열혈 혁명가. 천황 신화를 폐기하고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가공할 상상력의 소유자. 24살 때 쓴 1천 쪽이 넘는 대작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로 일본 사상계를 강타한 기괴한 사상가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를 만난다.

《기타 잇키》는 1936년 일본 전역을 뒤흔든 2ㆍ26 쿠데타의 정신적 지도자 기타 잇키의 삶과 사상을 끈질긴 추적과 철저한 고증으로 되살려낸 탁월한 전기이자 독창적인 역사서이다. 쿠데타의 배후라는 이유로 역사의 무덤에 깊숙이 매장당한 기타 잇키는 박정희와 5ㆍ16 쿠데타의 사상적 배경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의 사상사가 마쓰모토 겐이치가 30년에 걸쳐 200자 원고지 7천 장에 담아낸 이 책은 과격 천황 숭배자들의 우두머리이자 극우 파시스트로 오해받아 온 불온한 혁명가 기타 잇키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좌익과 우익 고정관념 너머의 존재, 일본 근대 사상계의 마왕

기타 잇키는 가장 격정적인 ‘천황 신앙’ 파괴자였다. 국체론이라는 이름의 천황 절대주의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해체한 사람이었다. 발행되자마자 모두 압수되어 금서로 묶인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는 사회주의와 국가주의를 결합한 사상서이자 천황 주권론에 맞서 국민 주권론을 제시한 이론서였다.
그는 스스로 ‘동양의 루소’라 칭했던 광기의 천재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자양분으로 삼아 스스로가 곧 국가의 체현자이기를 갈망한 국가사회주의자였다. 인간은 모두 고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정신적 귀족주의자였고, 계급 차별을 타파하고 하층을 상층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고상한 평등주의자였으며,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은 ‘순정(純正)’ 사회주의자였다. 동시에 그는 개인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한 개인주의자였고, ‘동양적 공화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신해 혁명에 뛰어든 낭만적 혁명가였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법화경을 낭송한 경건한 불교 수행자였다. 메이지 말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30년 동안 그는 일본 사상계의 ‘마왕(魔王)’이었다. 당대 일본의 지배 세력에게 그는 불온한 급진파였고, 위험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천황 신화를 거부했고, 천황 숭배라는 미신에 빠진 일본을 야만의 나라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의 원조였지만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는 무관한 독자적인 ‘파시즘 혁명가’였다.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판하고, 중국과의 전쟁이 결국 2차 세계대전을 불러와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 예언한 선견지명의 소유자였다. 이 점에서 그는 군국주의적 침략 논리로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은 일본 천황주의자나 군국주의자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정식으로 간행되기도 전에 금서가 된 《일본개조법안대강》은 아는 사람들끼리 비밀리에 필사해 돌려 읽는 가장 위험한 불온 문서였다. 일본 국가 혁명의 강령이 담긴 이 대작은 좌우를 넘어 지식 계층 전체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으며, 1936년 2·26 쿠데타의 주역이 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 ‘바이블’로 받아들여졌다. 기타 잇키는 청년 장교들을 사상으로 현혹했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쿠데타 주역들이 모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갈 때, 사형대에 선 이 사상의 지도자는 ‘만세’ 부르기를 거부했다.
과격 천황 숭배자들의 배후로 지목받았으나 한 번도 천황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던 절대적ㆍ비판적 개인, 카리스마 대 카리스마로 마지막 순간까지 천황과 맞섰던 거의 유일한 적수, 기타 잇키의 삶과 사상의 총체를 만난다.

30여 년의 추적 끝에 처음으로 밝혀낸 불온한 혁명가 기타 잇키의 총체적 진실!

《기타 잇키》는 2004년 일본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되어 “보기 드문 독창적 근현대사 연구” “뛰어난 문학성을 획득한 역사서”라는 찬사를 받은 《평전 기타 잇키(評傳 北一輝)》(전 5권)의 한국어판이다.
‘좌도 우도 아닌 일본을 그리는 지성’으로 불리는 저자 마쓰모토 겐이치는 필생의 역작인 《기타 잇키》에서 역사와 사상을 종횡무진 내달리는 해박한 지식과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사이비 혁명가, 극우 파시스트라는 오해 속에 가려져 있던 기타 잇키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또한 저자는 사회주의에서 국가주의에 이르는 기타 잇키의 사상적 편력을 통해 근대 일본이 수용하고 대결해야 했던 사상적 스펙트럼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쑨원과 쑹자오런을 비롯한 중국 신해 혁명의 주역들, 노동자들의 직접 행동을 주장한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천황 암살 계획을 세웠던 조선의 독립 운동가 박열, 한일 병합의 배후인 흑룡회와 우치다 료헤이, 만주국의 기획자 이시하라 간지에 이르기까지, 기타 잇키의 삶의 궤적을 따라 등장하는 근대 초 일본과 중국에서 활약한 사상가와 혁명가, 음모가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마저 명확하지 않은 한국의 지적 풍토에서 사회주의에서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기타 잇키의 사상적 행보는 조금 낯설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상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사상이 하나의 이념이나 신념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사유의 직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들에게, 기타 잇키의 사상적 역정은 삶과 사상과 행동의 관련성을 고민하는 데 시금석이 되어줄 것이다.

5ㆍ16과 2ㆍ26, 박정희와 기타 잇키

(1960년) 박정희가 일본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5ㆍ15 사건, 2ㆍ26 사건을 들먹이면서 찬사를 늘어놓자 황 주필(박정희의 친구이자 당시 <부산일보> 주필이던 황용주)이 “너 무슨 소릴 하노. 놈들은 천황절대주의자들이고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다. 그놈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린가!”라고 반박했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황용주가 “그것은 고루한 생각으로서 세계 평화에 해독이 된다.”고 반박하자 박정희는 열을 올렸다.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은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 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 <월간조선> 1991년 7월호
한국에서 기타 잇키라는 이름은 박정희, 5ㆍ16 쿠데타와 함께 회자된다. 박정희가 1936년 일본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인 2ㆍ26 사건을 높이 평가했으며, 2ㆍ26 쿠데타 주역들의 사상적 배후인 기타 잇키를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타 잇키는 박정희의 사상적 배후인가?

기타 잇키, 일본 사상계의 ‘마왕’

유배자들의 섬에서 자란 소년 - 메이지유신과 자유 민권 운동의 바람
1883년 일본의 니가타 현에 속한 사도 섬에서 양조장집 장남으로 태어난 기타 잇키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 특유의 변경 감각과 1870년대부터 일본을 휩쓴 자유 민권 운동의 바람을 맞으며 자랐다. 사도 섬의 지리적ㆍ역사적 성격은 자연스럽게 소년의 몸과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1868년의 왕정 복고 즉 메이지유신으로 국민 국가의 틀을 마련한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며 서구에서 도래한 근대의 낯선 시공간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민중의 권리 신장 요구를 반영한 자유 민권 운동이 187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정치계와 사상계를 강타했다. 기타 잇키는 자유 민권 운동 투사였던 아버지와 숙부, 스승들을 사표로 삼아 성장했고, 자유주의, 아나키즘, 사회주의를 비롯해 서구에서 들어온 온갖 이념들을 소개하는 신문, 잡지 등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

어려서부터 눈병으로 고생한 기타는 사도중학에 입학한 뒤에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끝에 결국 4학년 초에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그만둔다. 다시 몇 개월간 안과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기타 잇키는 1901년 봄에 도쿄로 무단 상경한다. 도쿄 행은 자신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세계가 현실과 어떻게 다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상과 만나다

1901년 도쿄 행은 기타 잇키를 사회민주주의자로서 각성시켰다. 당시 일본 정부는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외에서는 러시아, 청나라와 대립했고 국내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롯해 각종 사회 문제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타에게 가장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은 1901년 5월 18일 고토쿠 슈스이와 아베 이소오 등이 주축이 된 사회민주당의 창당과 곧 이은 금지 사태였다.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계급 타파를 위한 운동을 펼 것을 선언하며 출범했다. 사회민주당이 내세운 이상 강령은 군비의 완전 폐지, 계급 제도의 완전 폐지, 토지와 자본의 공유, 인민의 참정권, 보통교육, 평등주의의 확장 등이었다. 비록 사회민주당은 창당 즉시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기타 잇키는 사회민주당의 결성과 선언문에서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기타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자유 민권 운동의 물결이 다시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사회 선각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민주당 선언을 자신의 문제의식 위에 겹쳐놓고, 숙부와 스승들이 알려준 자유 민권의 이념, 역성 혁명, 메이지유신의 목표, 현실 사회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그 변혁 등과 같은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기 나름대로 현실 변혁의 방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세 치의 붓으로 세상도 뒤집을 만하다.” - 대담무쌍한 정치 논객의 등장

1902년 사도 섬에 돌아온 뒤 기타 잇키는 선거 연설단에 참여하거나 <사도신문>의 논객으로 맹활약한다. 때로는 차분하고 논리적인 글로, 때로는 화려하고 신랄한 독설로 상대를 제압하며 마음껏 붓을 휘두른다. 특히 1903년 2월 <사도신문>에 제8회 총선에 앞서 정치적 타협을 선택한 정우회를 옹호하는 글 <아름다운 타협>을 실으면서 반대파인 진보당계 신문 <사도마이니치신문>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 사건으로 기타의 이름이 섬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집안의 가업인 양조장을 폐업하고 가세가 기운 상황에서 1903년 5월 9일 아버지 기타 게이타로마저 병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장남인 기타는 집안에서 바라는 대로 장사에 뛰어드는 대신 문필의 길을 선택한다. 그에겐 이미 붓으로 자신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정신적ㆍ사상적으로 독립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된다.

“천황은 국민이 불러낸 자이다.” - <국민 대 황실의 역사적 관찰>

1903년 6월, 기타 잇키는 <사도신문>에 ‘천황 절대주의’ 국가관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새로운 국가 이념을 펼친 문제적 논설 <국민 대 황실의 역사적 관찰―이른바 국체론의 타파>를 발표해 파란을 일으킨다. 이 글에서 기타는 일본 역사를 고찰하여 메이지 국가의 국체론, 즉 ‘만세일계’ 천황 신화의 허구를 폭로하고, 일본제국은 국민의 것이며 천황은 그 국민이 불러낸 자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일찍이 존황 사상, 사회주의, 아나키즘, 국가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낭만주의 등 온갖 이념들이 얽히고설킨 사상의 용광로에서 기타가 어렵사리 추출해낸 것 중 하나가 천황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국체론’이었다. “천황은 신성하며 범할 수 없다.”고 말하는 메이지 헌법의 국체론, ‘만세일계의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신민을 통합해야 한다는 국체론은 기타가 보기에 지배계급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 대 황실의 역사적 관찰>은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 불경하고 위험한 글이라는 비난이 빗발치면서 연재 이틀 만에 중단되고 만다.

“전쟁은 생존 경쟁이다.” - 제국주의적 사회주의자

기타 잇키의 국체론 비판은 러일전쟁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시점, 그러니까 시대의 긴박함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천황의 제국’이 아니라 기타 자신이 꿈꾸는 ‘나의 제국’을 실현하려면 국가가 살아남아야만 했다. 아니, 오히려 세계 대정부를 건설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기타는 일찍이 인류가 행복을 얻기 위해선 사회 선각자=지식인이 이끄는 단체가 현실을 개혁하고 솔선해 ‘세계 대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은 세계 대정부를 이끌 유일한 나라였다.
기타에 따르면, 20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이며, 제국주의는 전쟁의 동의어이다. 그는 이 인종적ㆍ민족적 경쟁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타는 이렇게 말한다.

기타는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해 반전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싸울 줄 모르는 생존 경쟁의 패배자”라고 단정했다. 그는 자신을 선택된 인물이자 강자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사회주의자가 반전론을 주장하는 것은 약자의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와 대결하여 그것을 타파하는 것을 자신의 ‘강력(强力)’으로 믿는 사회주의자는 어디까지나 고고하며, 연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기타의 내면에서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모순적으로 기묘하게 결합해 있었다.
기타의 제국주의적 사회주의는 국내적 계급 투쟁과 국제적 계급 투쟁을 같은 계급 투쟁으로 파악함으로써 반전론 사회주의를 분쇄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계급 투쟁이라고 본 것이다.

“한마디로 천재의 저작”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1904년 여름, 기타 잇키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과 <사도신문>에 글을 연재하며 겪은 불경 사건 등을 뒤로 한 채 사도 섬을 떠나 도쿄로 상경한다. 그는 도쿄의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청강생으로서 일 년간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우에노 제국도서관에서 독학을 하면서 국체론 비판과 자신의 혁명 구상을 담은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저술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06년 2월 1,000쪽에 이르는 대작을 완성한다. 그러나 책을 출판해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출판을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과로로 병상에 눕는 일이 잦았던 기타는 마지막 힘을 내어 신문에 낼 광고문을 직접 작성했다. “동양의 루소, 메이지의 라이 산요가 나타나다……. 학자 계급의 정복……. 1,000쪽의 대작이 사람들을 광분케 한다.”라는 문구였다.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는 1906년 5월 9일 발행되었다. 발행 부수는 500부, 가격은 2엔 85전(정가는 3엔)이다. 500부 가운데 50부 정도는 사도 섬과 중앙의 명사들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기타는 세상이 이 책으로 들끓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24살 난 무명의 청년이 쓴 책에 충격을 받은 학자와 명사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법학박사로서 도쿄고등상업학교 교수였던 후쿠다 도쿠조는 이렇게 이 책을 극찬했다.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한 권으로 기타 잇키는 일본 사상계의 스타가 되었다. 책이 관심을 끌면서 기타는 글이나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 직접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가타야마 센,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 오스기 사카에 등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지만 국가관의 차이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기타의 국체론=혁명론의 파괴력을 꿰뚫어본 내무 당국에 의해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는 출간된 지 5일 만에 발매 금지되었다. 책이 출간되면서 기타의 주변을 경찰들이 주시하기 시작했고, 그가 사회주의자로 등록된 지 이틀 후인 5월 14일에 발매 금지 처분이 내려졌던 것이다.

천황이 주인인가, 국민이 주인인가 - 천황 주권설 대 천황 기관설

기타는 현실의 변혁을 주장하기 위해, 메이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타도하기 위해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기타 잇키는 천황을 가부장제의 수장으로 파악하는 국체론자들과 국가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가난과 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현 상황을 타개할 이념으로서 ‘순정(純正)사회주의’를 제시한다.
기타에 따르면 “국토는 천황의 사유지가 아니고 인민은 천황의 사유물인 노예가 아니”라 국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주와 자본가로 이루어진 부르주아지가 토지와 인민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 있다. 빈곤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가 없다. 그의 사상적 기획의 핵심은 하층민으로 전락한 국민을 상층민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제 천황은 특권을 지니긴 했지만 국가에 귀속된 국민의 일원이 된다. 천황은 의회와 더불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천황 주권설과 구별되는 천황 기관설의 요체이다. 천황 주권설에 입각해 모든 것을 천황의 이름으로 소유하고 재단하고자 했던 국체론자들을 ‘복고적 혁명주의자’라 비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적 귀족주의자로서 나=국가라는 사상에 기초한 그의 사회주의적 구상은 당시 동아시아 사상계를 강타했던 진화론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진화론에 입각한 기타 잇키의 사회주의적 구상이 개인이나 계급이 아니라 국가를 주체로 한 것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황에게 예속된 국민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대일본제국’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였다. 개인은 국가로 수렴될 수밖에 없고, 국가들은 경쟁=전쟁을 통해 더 큰 국가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기타 잇키의 사상은 소아(小我)=개인에서 대아(大我)=국가로 무아(無我)=세계 연방으로 확산되는 구도 위에 펼쳐진다.
기타 잇키의 ‘순정한’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이며, 발행되자마자 금서로 찍힌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라는 ‘불경스러운’ 책은 ‘사이비 국체론자’들이 내세운 천황과 기꺼이 싸울 각오를 다지는 또 다른 카리스마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국 혁명에 뛰어들다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가 발매 금지를 당한 뒤 기타는 크게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으로 현실을 변혁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상을 드러내 밝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1,000엔이 넘는 빚과 위험 인물이라는 낙인이었다. 이때 기타에게 중국 혁명이 돌파구로 등장한다.
그는 미야자키 도텐, 가야노 나가토모, 히라야마 슈 등 중국 혁명 낭인들의 아지트였던 ‘혁명평론사’와 만난다. 쑨원이 주재하는 중국혁명동맹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던 혁명평론사 동인이 되면서 기타는 황싱, 장지, 쑹자오런 같은 중국 혁명가들과 혁명 동지로서 친교를 맺는다.

특히 기타는 외국의 도움으로 중국 혁명을 이루려 하는 국제주의자 쑨원보다 농민 봉기의 에너지를 혁명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한 민족주의 혁명가 쑹자오런에게 크게 공감했다. 기타는 쑹자오런의 혁명 방식에서 혁명이 어떤 방식으로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에서 기타는 민족적 전통을 매개로 사회주의를 설파하고 국체론 파괴를 이론화했는데, 그것은 보통선거나 의회 정치 중심의 혁명 방식과 충분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끝내 그의 논리는 혁명론=유토피아론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맹회에 들어가 우선 쑹자오런과 인간적으로 공명하고 쑹자오런이 중국의 토착적 비밀결사를 장악한 인물과 손을 잡는 것을 보고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기타에게 1911년 10월 10일 신해 혁명 발발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혁명 동지 쑹자오런이 요청하여 마침내 1911년 11월 중국으로 건너간다. 기타 잇키는 명예와 이권을 찾아 혁명이 한창인 중국 대륙을 떠도는 대륙 낭인=중국 깡패와 자신이 동일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대륙 낭인들과 달리 혁명 중국의 향방을 주시하면서 혁명을 통한 사회 변혁의 가능성과 환멸을 모두 경험한다. 혁명파는 청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고 1912년 1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세운다. 그러나 임시정부 초대 대총통 쑨원은 정국의 안정을 위해 뛰어난 정치 책략가인 군벌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겨주고 만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에 맞서 내각을 뛰쳐나온 쑹자오런과 혁명 동지들은 국민당을 세우고 총선거에서 승리하지만, 차기 총리로 확실시되던 쑹자오런이 1913년 3월 자객의 총에 암살당하면서 중국 혁명은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일본 혁명의 강령 《일본개조법안대강》
- “일본의 혼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절친한 벗이자 혁명 동지인 쑹자오런을 잃고 실의에 빠진 기타 잇키에게 일본 영사관에서 중국 퇴거 명령을 내린다. 1913년 4월 기타는 중국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 스즈코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온다. 중국 혁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기타는 중국 혁명의 경험을 기록한 《중국혁명외사》를 마무리하자마자 1916년 6월 다시 상하이로 향한다.
그러나 그가 상상했던 중국 혁명의 꿈은 스러지고 있었다. 중국 내셔널리즘 혁명에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기타를 맞이한 것은 중국 민중의 배일ㆍ반일 운동이었다. 혁명의 소용돌이를 지나고 있는 중국에서 이권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일본 정부가 ‘대중국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결과였다. 기타는 ‘동양적 공화정’의 중국과 ‘동양적 군주정’의 일본이 동맹을 맺어 서양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혁명 중국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기타는 일본에 ‘혁명 제국’을 세우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1919년 여름 상하이에서 일본 혁명 강령인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이후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중국 혁명이 실패한 원인을 촘촘히 살피면서 자신의 경험을 일본의 국가 개조를 위한 동력으로 활용하려 했다.

기타 잇키는 일본 혁명의 강령이 담긴 책을 들고 1920년 초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천황의 대권에 따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일본국 헌법을 3년 동안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여 임시정부를 발동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3년 동안 사유재산을 제한하고, 은행, 무역, 공업을 국가가 관리하고, 나아가 황실 재산을 국가에 하사하고, 화족제도 등을 폐지하자는 대담무쌍한 계획을 담고 있었다. 또한 귀족제도의 폐지, 보통선거 실시, 사유재산 제한, 대자본의 국유화, 노동자 권리 향상, 국민 인권의 옹호 등 혁명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은 기타가 새로 참여한 국가주의 단체 ‘유존샤(猶存社)’에서 비밀리에 인쇄, 배포했다. ‘극비’라는 도장을 찍어 배포했지만 1920년 1월 발매와 반포 금지 처분을 받는다. 47부밖에 인쇄하지 않았고 그것도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것이 태반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필사본의 형태로 비밀리에 파문을 넓혀 갔다.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라 - 희대의 위험 사상가 기타 잇키

기타 잇키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읽고 찾아오는 다양한 연령ㆍ계층의 사람들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압도했다.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청년 기시 노부스케와 신흥 종교 오모토교(大本敎)의 교주 데구치 오니사부로도 기타 잇키에게 매료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기타 잇키의 카리스마적인 매력은 지적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예리한 풍모, 자유롭고 선정적인 언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일본개조법안대강》이라는 혁명 강령이 지닌 사상적 매력에 근원이 있었다. 《일본개조법안대강》은 천황을 혁명 원리로 이용해 국가 개조를 이룬다는 발상을 담고 있었다. 기타 잇키가 전전(戰前)에 가장 위험한 사상가로 불렸던 이유는 쿠데타를 혁명의 수단으로 상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기타 잇키가 볼 때 일본이라는 국가는 재벌과 정치 파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국가를 국민을 위한 국가로 바꾸는 것이 기타 잇키가 세운 국가 개조론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재벌과 소수의 정객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를 국민의 국가로 바꾸는 방법은 무엇인가. 기타는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직접 행동에 의한 국가 혁명을 상상했다. 직접 행동이란 테러와 암살을 뜻했고, 실제로 2·26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은 고위 관료를 암살하는 방법을 택했다.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기타 잇키가 제시한 것은 위관급 청년 장교와 병사들에 의한 쿠데타였다.
이러한 국가 개조 사상이 담긴 《일본개조법안대강》은 우익과 좌익을 포괄하는 지식 계층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을 뿐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타락상에 분노하고 있던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 ‘바이블’로 받아들여졌다. 청년 장교들은 일본의 해군력에 제한을 가하는 굴욕적인 런던 해군군축조약의 체결과 전국을 휩쓴 대기근의 참상을 보면서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층에 분노하고 있었다.

니시다 미쓰기, 무라나카 다카지, 이소베 아사이치를 비롯한 청년 장교들은 이 바이블에 근거해 국가 개조를 실천하고자 했으며, 그 운동은 1936년 2월 26일 1,483명의 장교와 병사가 가담한 쿠데타로 폭발한다. 카리스마적 권력으로서 기타 잇키가 발산한 사상이 청년 장교들에 의한 구체적인 운동으로 전화하는 순간이었다.

기타 잇키와 2ㆍ26 쿠데타 - ‘천황’ 대 ‘마왕’

1936년 2월 26일 새벽, 일본 전역을 뒤흔든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육군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부패한 재벌과 군 상층부를 제거하고 개혁을 이루기 위해 천황 친정 체제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초기에 주요 거점을 점령하면서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천황의 진압 명령에 따라 나흘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군부는 기타 잇키라는 사상가를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한다. 청년 장교들이 그가 쓴 《일본개조법안대강》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청년 장교들은 《일본개조법안대강》에 깔린 기타 잇키의 혁명 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기타는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청년 장교들은 말 그대로 천황을 ‘받들어’ 모시는 혁명을 계획했고 천황의 재가를 기다리다가 실패했던 것이다.

쿠데타 발생 이틀 후인 1936년 2월 28일 기타 잇키는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시청 조사를 거쳐 비공개 군법회의 재판정에 섰다. 기타 잇키에 대한 재판은 “순진한 ‘황군’의 청년 장교들에게 외부에서 불령·과격한 사상을 주입한 선동자가 있다고 예단하고 군부의 논리로 재단하려는 장”이었다. 기타는 쿠데타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1936년 7월에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청년 장교들이 사형을 당하자 더는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판사들 대부분은 기타에게 동정적이었고 법률 적용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기타가 재판 투쟁을 시도했다면 재판부가 곤란한 입장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타는 기꺼이 죽음으로 나아가려 했다.

청년 장교들이 자신들의 뜻을 받아들여줄 것이라 믿었던 천황이 진압 명령을 내림으로써 쿠데타는 실패로 끝난다. 이 지점에서 천황을 이용해 또 다른 천황이 되고자 했던 기타 잇키의 낭만적 혁명론은 막다른 길로 접어든다. 천황이라는 카리스마와 대결함으로써 스스로 ‘마왕’이 되고자 했던 낭만적 정신은 사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세계대전을 부를 것이다.” - 기타 잇키의 2차 세계대전 경고

기타 잇키가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쓰게 된 계기는 일본이 중국의 이권을 노리고 ‘대중국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자 이에 격분한 중국 민중이 벌인 반일 시위(5ㆍ4운동)를 상하이에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일이었다. 서구 세력에 맞서 중국과 일본의 동맹을 바랐던 기타는 ‘대중국 21개조 요구’를 철회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본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와 중국 혁명가 탄런펑의 회담을 주선하는 한편 오쿠마에게 ‘대중국 21개조 요구’를 철회하고 혁명 중국과 제휴하라고 설득했다. 중국과 손을 잡고 북쪽의 러시아와 남쪽의 영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쿠마는 기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뒤에도 기타는 계속해서 일본의 중국 침략 야욕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기타는 이제 일본은 명백히 루비콘 강을 건넜으며 이 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프롤로그라고 예견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위기의식에서 기타는 1932년 4월 일본의 ‘대외 국책’에 관한 건백서를 써서 배포했다.

일본 정부의 무모한 제국주의적 행보에 대한 위기의식은 3년 뒤인 1935년에 쓴 <일ㆍ미 합동 대중국 재단의 제의>라는 건백서로 이어졌다. 여기서 기타는 미일전쟁은 반드시 “영국ㆍ미국ㆍ러시아ㆍ중국 대 일본의 전쟁” 즉,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미일전쟁은 “중국을 문제”삼는 형태로 발발할 것이다. 그리고 극동에서 미일전쟁은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것이며, 이 전쟁에서 일본은 결코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기타 잇키는 만주사변 이후 악화일로를 걷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회복시켜 파멸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해 1935년 말 중국 행을 계획했다. 난징에 있는 장제스 정권의 외교부장 장췬이 신해 혁명 당시 기타의 혁명 동지였다. 그러나 1936년 3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기타의 중국 행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 3월에 2ㆍ26사건이 일어났다.
기타 잇키는 사형 전날인 1936년 8월 18일에도 문하생 바바조노 요시마에게 일본의 미래를 두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국가는 앞으로 10여 년 사이에 급변할 거네. 더 빠를지도 모르지. 4, 5년 안에 일어날지도 모르지. 반드시 대체로 《개조법안》같이 될 테니 그런 생각으로…….”
기타가 말한 4~5년 안이라는 시기는 곧 1941~1942년경을 의미한다. 1941년 12월 8일에는 영ㆍ미를 상대로 한 대동아전쟁이 시작되고, 4년 뒤인 1945년 8월 15일에는 일본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1935년을 전후로 기타가 보인 세계 정치에 대한 인식은 어느 누구보다 날카롭고 정확한 것이었다.

사이비 혁명가 혹은 극우 파시스트라는 오해

기타 잇키는 다이쇼 말기 무렵부터 쇼와 전반기에 걸쳐 놀라운 광채를 발산했으며, 그 광채는 패전 후에도 음으로 양으로 주변 사람들을 휘감았다. 광채의 핵심은 그가 쓴 세 권의 책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중국혁명외사》 《일본개조법안대강》이었다. 1946년 11월에 점령군의 지도 아래 민주화 조항을 담은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어 1947년 5월에 시행되었는데, 이 민주화 조항에 기타의《일본개조법안대강》의 개조 강령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 때문에 기타의 《일본개조법안대강》이 전후 헌법에 활용되었다는 전설이 생겨났던 것이다.
《일본개조법안대강안》과 전후 헌법에 공통되는 부분이 많은 것은 결국 기타 잇키 혁명 사상의 근간이 민주주의적이었다는 사실, 바꿔 말하자면 기타가 천황의 이름을 이용한 ‘민주 혁명’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기타 잇키는 쿠데타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처형당한 뒤로 사이비 혁명가 혹은 극우 파시스트라는 오해를 받으며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저자는 기타 잇키가 좌익과 우익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혁명가였다고 말한다.

<책속으로 추가>

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도신문> 논설위원 입장에 있던 라쿠텐 하세가와 기요시가 전년 중반 무렵 홋카이도로 건너간 이후 …… 그 틈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애태우고 있던 <사도신문>의 입장에서 기타는 오래간만에 나타난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이때부터 기타는 이 신문의 제1면을 계속 맡게 되는데, 이리하여 유아독존적 기질을 지닌 청년의 자존심은 만족스러운 시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섬의 자치 문제, 신평민을 위한 메이지학교의 사주(社主) 업무, 어업조합장 등 중요한 일을 맡아 분주하던 모리 지키는 자신의 후계자를 발견하고서 내심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타가 참가함으로써 모리가 몇 년에 걸쳐 주장했던 “계급 타파와 평민주의”가 크게 보강되기도 했다. - 제1부 3장 세계 창조의 징후ㆍ135~136쪽에서

기타는 후지와라 이후 “제왕의 실권을 빼앗은” 영웅들을 ‘난신(亂臣)’ ‘적자(賊子)’라 하여 비난한다. 물론 ‘난신’ ‘적자’라는 말은 기타의 반어(反語)이자 역설을 위한 복선이다. …… 더욱이 국민은 이들 영웅(난신과 적자)을 지지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국민은 단죄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국민은 언제나 옳다. 이렇게 기타는 국민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전제로 내세웠다. …… 연재 이틀째의 글 끝에는 미완이라고 적혀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이른바 국체론의 ‘만세일계’ 천황제 신화의 허구를 폭로하고, 제왕의 실권을 탈취한 영웅이야말로 국가의 생명을 지속시킨 자이자 천명을 받은 자라고 암시하면서 난신ㆍ적자라는 반어를 제시한 단계였다. 즉, 기타는 난신ㆍ적자 쪽에 진정한 국체론의 담당자가 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라는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천황이 국민의 지지에 의해 국가 통일의 상징으로서 요청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일본제국은 국민의 것이며, 천황은 국민이 불러낸 자이다. - 제1부 4장 ‘나의 제국’과 사회주의ㆍ176, 177쪽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저 앉아서 멸망할 것인가. 농업 입국설은 앉아서 멸망하는 길이며, 상공 입국설도 앉아서 멸망하는 길이다. 나는 말한다, 전쟁만이, 전쟁으로 제국주의를 주장하는 길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전쟁은 죄악이다. 하지만 경제 전쟁은 더욱 심각한 죄악이다. 제국주의는 사람의 도리를 돌보지 않는다. 더욱이 제국주의의 도전에 대해서는 사람의 도리로 응할 수가 없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제국주의의 죄악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첫 번째 요건은 영토 확대에 있다. 전쟁은 그만두려고 해야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 제1부 4장 ‘나의 제국’과 사회주의ㆍ201~202쪽에서

“나는 명백하게 고백한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것이다. 거의 종교이다. 나는 호흡을 멈추지 않는 한 포기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주장은 무가치한 나의 생애에서 최후의 호흡에 이르기까지 유일한 것이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명백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버릴 수가 없다. 아니,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단연코 제국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제국주의의 주장은 사회주의 실현의 전제이다. 내가 사회주의를 품고 있지 않다면 제국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를 내걸고 러일 개전을 외치는 바 그 바탕에 사회주의의 이상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자이면서 제국주의자이다.” - 제1부 4장 ‘나의 제국’과 사회주의ㆍ204쪽에서

완성된 원고의 내용은 사회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단지 사회주의에 관한 것이었다면 발행 금지당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국체론 비판 부분이 메이지 국가의 터부를 깨고 있었다. 물론 발행 금지를 우려한다고 해서 펜을 무디게 할 기타가 아니었다. 그러나 1906년 1월 7일에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이 무너지고 자유주의적인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출현한 것을 기타는 발행 금지의 위험성이 줄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 동생 레이키치는 기타의 판단에 부정적이었다. 2년 전에 쓴 <국민 대 황실의 역사적 관찰>이라는 작은 논문조차 그렇게 큰 불경 사건을 불러일으켰던 일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또 레이키치가 우려한 것은 발행 금지만이 아니었다. 책을 발행해줄 곳이 없었다. …… 결국 기타가 출판을 강행하려면 자비로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 제2부 1장 중앙에 대한 도전ㆍ284, 287쪽에서

“저의 소감은 일본어는 물론이거니와 서양어로 나온 저서 중 근래 이처럼 통쾌한 저서를 본 적이 없다는 한 가지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천재의 저작’이라 평가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메이지의 학계에서 이러한 저작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은 제가 가장 감사하는 바입니다. …… 귀하가 쓴 저서의 근본 사상과 입론이 매우 방대함에 놀라고, 필치의 신랄함과 방증의 교묘함에 취합니다. 생각건대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밖의 평범한 것에 비하면 분명 훨씬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를 일본어로 묻어버린다는 것은 다소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제2부 3장 혁명과 망명ㆍ378쪽에서

기타에 따르면 군주 주권론은 중세의 산물이며 따라서 복고적 주장이다. 군주 주권론은 “군주를 위하여”를 표어로 내건다. 즉 ‘충군’이다. 이와 달리 국가 주권론은 근대의 산물이며 진화적 주장이다. 그것은 “국가를 위하여”를 표어로 내건다. 즉 ‘애국’이다. 그렇다. 기타는 천황제 국가의 ‘천황=국가’라는 허구를 간파하고 천황은 국민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한 분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천황에게는 “헌법 개정의 발안권을 지닌다.”는 특권이 주어져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권이지 절대권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타의 국체론 비판은 ‘천황=국가’의 허구(국체 이데올로기)에 대해 국민=국가설을 대치시킨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 제2부 2장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ㆍ344쪽에서

그 무아를 향한 과정을 밝히는 것이 사회주의이며, 여기에서 유토피아는 과학의 이름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기타의 사회주의는 이론이라기보다 신앙에 가깝다. 참고로 ‘무아’의 세계에 사는 것은 ‘유신인(類神人)’이 아니라 ‘신류(神類)’이다. 인류는 진화하여 신류가 된다. …… 세계 연방에서 전쟁은 소멸하고 계급 투쟁 역시 필요하지 않다. 유신인은 “날개를 달고 진화해 가는” 존재가 된다. 그야말로 유토피아의 실현인데, 기타가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이상(즉 종교) 아래 과학을 구사하려 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저 황당무계하다며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열광이 그를 충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 제2부 2장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ㆍ328쪽에서

기타는 한탕주의로 중국 혁명을 머릿속에 그린 것이 아니며, 또 화약 냄새 나는 중국 혁명이 더 멋있다는 모험주의에서 동맹회에 가담한 것도 아니다. 기타는 “라파예트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라고 말하는 동생 레이키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분명 망명이라는 비장한 뜻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인이 되어 중국에 혁명의 근거지를 만들고자 했던 (미야자키) 도텐의 근원적인 발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 제2부 3장 혁명과 망명ㆍ429쪽에서

만약 기타에게 전향이라는 사태가 있었다면 바로 이때였다. 그렇다고 사회민주주의자에서 국가주의자로의 전향은 절대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향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에서 보통선거나 의회 정치를 중심으로 한 혁명 운동을 설파한 기타가 만약 이 단계에서 혁명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상태를 상정한다면 쑨원과 황싱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 전통을 매개로 혁명 사상을 생각한 기타의 입장에서 본다면, 혁명 전쟁에서 전통적 에토스의 체현자인 국민=농민의 에너지를 혁명에 끌어들이는 쑹자오런과 탄런펑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는 쑹자오런과 탄런펑의 결맹을 보고 그렇게 깨달은 것이다. 이리하여 기타는 보통선거나 의회 정치를 중심으로 한 혁명 운동은 물론이고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한 직접 행동과도 결별했다. - 제2부 4장 중국 혁명을 향하여ㆍ486쪽에서

“나는 10여 년 동안 중국 혁명에 참여했던 생활을 일단 접고 일본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십여 년 사이에 가속도가 붙은 듯 부패하고 타락한 본국을 저대로 두었다가는 대(對)세계 정책도 대중국 정책도 본국의 정책도 분명히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나라 말의 혁명 무렵 그러니까 민국과 다이쇼 원년(1911년) 전후 무렵에는 위태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저건 아니라고 다투면서도, 뭔가에 늘 억눌려 있으면서도 이렇게까지 모든 게 끝장났다고 절망한 적은 없었다. …… 그렇다.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본의 혼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일본 스스로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잡다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본국의 혁명적 지도자에게만이라도 혁명제국 골격 구성의 약도를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전 아시아 7억 인구를 방위할 ‘최후의 봉건 성곽’은 태평양 연안에 세워질 혁명 대제국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 법안을 기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제3부 6장 다시 일본으로ㆍ654쪽에서

기타의 생각에 따르면 천황은 국가 지배 기관이다. 그는 그 이름을 이용하여 다시 말해 “천황을 받들어” 국가를 개조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천황은 ‘혁명 원리’로서 기타의 국가 개조를 위해 이용된다. …… 메이지의 ‘대일본제국헌법’이 천황 대권을 설정한 것은 정부 지도자들이 천황을 ‘지배 원리’로 삼아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타의 《개조법안》에서는 천황이 ‘혁명 원리’로 바뀐다. 그리고 혁명 원리로서 천황과 국민(=군대)을 직접 연결시킴으로써 기타는 국가 개조 즉, 혁명을 실현하고자 기도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혁명 사상가 기타 잇키의 독창적인 발상이었다. - 제3부 7장 《일본개조법안대강》ㆍ674, 675쪽에서

국가 개조에 열정을 기울이는 스무 살의 청년 군인들은 이러한 기타의 고무에 선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타의 저작을 읽으면 하층 군인들의 혁명 운동(쿠데타)이야말로 일본 개조의 핵심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스에마쓰 다헤이는 사관학교 교육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군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기타 잇키라는 “예리한 눈빛에 중국옷을 입은, 일개 중국 낭인”을 통해 손에 넣은 것이다. 스에마쓰는 군인 정신이란 상관이나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국가를 구제하고 국가 혁신을 짊어지는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의식했다. - 제4부 5장 2ㆍ26사건 전야ㆍ929쪽에서

1936년 7월 12일에 청년 장교들이 사형을 당한 뒤에 그는 각오를 굳혔다. 자신의 사형에 대해서 더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 하나의 사상이 실현될 때는 반드시 그것에 목숨을 바치는 자가 있어야 한다. 부인에게 한 발언에서 볼 수 있는 ‘사석(捨石)’, 다시 말해 ‘인간 대들보’가 그것이다. 뤼순 함락을 위해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두 아들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개조법안》의 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우리들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타는 청년 장교들이 희생되었으니《개조법안》의 작성자인 자신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 제5부 2장 기타 잇키의 긴 그림자ㆍ1093~1094쪽에서

기타 잇키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청년 장교들을 ‘토벌’하라는 의사를 밝힌 사람이 다름 아닌 쇼와 천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옥중의 기타는 문하생 바바조노 요시마에게 다음과 같은 하이쿠를 써서 건넸던 것이다. “도련님에게 투구를 빼앗겨서 진 싸움”. 이 하이쿠는 기타 잇키가 ‘도련님’ 쇼와 천황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실마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증오나 반발이 아니라 어린 군주에 대한 ‘배치(背馳)’, 즉 같은 카리스마로서 대립하는 입장에서 경쟁하는 의식이었다. 기타는 자신이 천황과 경쟁에서 패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 머리말ㆍ48쪽에서

기타 잇키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청년 장교들을 ‘토벌’하라는 의사를 밝힌 사람이 다름 아닌 쇼와 천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옥중의 기타는 문하생 바바조노 요시마에게 다음과 같은 하이쿠를 써서 건넸던 것이다. “도련님에게 투구를 빼앗겨서 진 싸움”. 이 하이쿠는 기타 잇키가 ‘도련님’ 쇼와 천황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실마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증오나 반발이 아니라 어린 군주에 대한 ‘배치(背馳)’, 즉 같은 카리스마로서 대립하는 입장에서 경쟁하는 의식이었다. 기타는 자신이 천황과 경쟁에서 패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 머리말ㆍ48쪽에서

중국을 문제 삼아 일ㆍ미 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점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행히 오늘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이대로 방치해 두면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양국의 전쟁, 즉 양국을 파멸적 심연으로 빠뜨릴 불상사가 도래할 것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일ㆍ미 양국이 중국 문제로 태평양에서 사투를 벌인다면 가령 1, 2년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태평양의 패권도, 문제가 되는 중국 그 자체의 권익도 1, 2년이라는 기간에 모두 대영제국의 수중에 넘어가리라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이 명백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현재의 세계 정세와 그 추이를 바라볼 때 대일본제국은 태평양에서 미국, 대서양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으며, 또 운명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극동에서 점화해서는 안 됩니다.(<일ㆍ미 합동 대중국 재단의 제의>에서)
- 제5부 2장 기타 잇키의 긴 그림자ㆍ1098~1099쪽에서

중국을 문제 삼아 일ㆍ미 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점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행히 오늘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이대로 방치해 두면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양국의 전쟁, 즉 양국을 파멸적 심연으로 빠뜨릴 불상사가 도래할 것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일ㆍ미 양국이 중국 문제로 태평양에서 사투를 벌인다면 가령 1, 2년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태평양의 패권도, 문제가 되는 중국 그 자체의 권익도 1, 2년이라는 기간에 모두 대영제국의 수중에 넘어가리라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이 명백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현재의 세계 정세와 그 추이를 바라볼 때 대일본제국은 태평양에서 미국, 대서양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으며, 또 운명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극동에서 점화해서는 안 됩니다.(<일ㆍ미 합동 대중국 재단의 제의>에서)
- 제5부 2장 기타 잇키의 긴 그림자ㆍ1098~1099쪽에서

《청년 기타 잇키》를 썼을 무렵 나는 우익에서 좌익으로 가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는 물론이고 《기타 잇키론》(1972년)에서도 기타를 좌익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기타를 우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기타를 ‘혁명적 낭만주의자’라고 불렀을 따름이다. 그리고 정치적 낭만주의가 기회 있을 때마다 혁명에서 반혁명, 반혁명에서 혁명으로 미묘하게 요동치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기타를 혁명적 낭만주의자로 규정한 사실만 갖고 그를 좌익으로 부른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은 당시 일반적으로 좌익은 혁명, 우익은 내셔널리즘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좌익은 혁명, 우익은 내셔널리즘이라는 분리는 좌익은 계급, 우익은 천황, 혹은 좌익은 진보, 우익은 반동이라는 식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기타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는 존재였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일본적인 혁명이면서 그 일본은 대개 우익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천황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러한 기타의 존재 그 자체를 어둠 속에서 끌어냄으로써 좌익은 혁명, 우익은 내셔널리즘이라는 선을 그은 근대 일본 사상의 아포리아(막혀 있는 통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 것이다.
- 제5부 4장 혁명 전설ㆍ1151~1152쪽에서

목차

옮긴이 해설_ 기타 잇키, 일본 사상계의 ‘마왕’ (정선태)
머리말_ 혁명적 낭만주의자의 초상

제1부 청년 기타 잇키 (1883∼1905)

제1장 의식의 심연
유배자들의 섬
섬을 깨운 자유 민권의 바람
기타 데루쓰구 출생
양조장집 장남
니치렌과 어머니
자유 민권 운동과 아버지
소년의 세계

제2장 이상과 현실
사도중학의 연설가
변혁의 이념과 만나다
퇴학과 입원
격절의 첫사랑
사회주의 조우

제3장 세계 창조의 징후
“붓으로 출세하겠다.”
대담한 논객
아버지의 죽음
‘신성한 연애’ 논쟁
낭만적 세계 창조를 향한 사랑

제4장 ‘나의 제국’과 사회주의
천황의 국민 대 국민의 천황
불경 사건에 휘말리다
러일전쟁 찬반 논쟁
제국주의적 사회주의자
불경 사건의 재연

제5장 낭만적 혁명의 길
시인의 탄생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섬을 떠나다
와세다에서 보낸 일 년

보론_ 기타 잇키와 사도 섬

제2부 국체론에 맞선 사상가 (1905∼1911)

제1장 중앙에 대한 도전
도쿄를 향하여
우에노 제국도서관의 독학자
“동양의 루소 나타나다.”
사상의 변혁을 위하여
순정사회주의의 입장 1
순정사회주의의 입장 2
순정사회주의의 입장 3

제2장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정신적 귀족주의자
사회주의의 윤리적 이상
철저한 개인주의자
진화론과 사회철학
국가주의와 세계 연방
여성론과 연애론
우주 목적론과 낭만적 유토피아
복고적 국체론 비판
혁명적 국체론
‘만세일계의 황통’은 없다
민주주의 혁명론
고토쿠 슈스이의 무정부주의 비판
혁명적 이상주의

제3장 혁명과 망명
“한마디로 천재의 저작”
발매 금지와 압수
분노의 나날
분책 출판 좌절
혁명평론사의 동인
자살과 암살
중국 혁명으로 눈을 돌리다
중국동맹회 가입
혁명평론사 해체

제4장 중국 혁명을 향하여
쑹자오런과의 결합
혁명에서 소외된 귀머거리“혁명 자금을 부탁합니다.”
실패한 자금 조달
일본사회당과 중국 혁명
간도 영유 문제
중국 밀항 실패
1910년의 대역 사건
대륙으로

제3부 중국으로 간 혁명가 (1911∼1921)

제1장 신해 혁명 속으로
1911년, 상하이
혁명 지휘자 쑹자오런
혁명 권력을 누가 잡을 것인가
상하이 봉기
잠 못 이루는 밤
점령 지역에서
우창으로 떠나다

제2장 혁명 동지 쑹자오런
쑹자오런과의 재회
위안스카이 등장
때늦은 혁명가
난징성 대학살
난징 탈출

제3장 난징 임시정부
‘동양적 공화정’
한양 패전
전략가 쑹자오런
미야자키 도텐의 상하이 도착
권력 투쟁
위안스카이 대총통설

제4장 중화민국 탄생
쑨원 대총통 옹립
상하이 부두에 선 쑨원
쑨원 임시대총통 취임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의 내분

제5장 청나라의 종말
위안스카이의 반격
“암살이 혁명의 성패를 결정한다.”
황제의 퇴위
위안스카이 대총통
혁명의 파워 게임
쑹자오런 암살
《중국혁명외사》

제6장 다시 일본으로
도쿄의 망명 생활
‘대중국 21개조’ 비판
다시 상하이로
사라진 중국 혁명의 꿈
일본 혁명의 강령, 《일본개조법안대강》
일본으로 돌아오다

제7장 《일본개조법안대강》
‘마왕’ 기타 잇키
천황을 이용하는 혁명
《개조법안》의 국가 구상
테러리스트 아사히 헤이고
아사이 헤이고의 유서
죽음의 외침
유존샤의 해체

보론_ 국가 개조 운동-로소카이에서 유존샤까지

제4부 막후의 카리스마 (1921∼1935)

제1장 니시다 미쓰기, 최초의 숭배자
청년 장교 니시다 미쓰기
‘아름다운 죽음’을 바라며
혁명 사상가와 혁명 실행자
“조선은 일본의 속국도, 식민지도 아니다.”
박열ㆍ후미코의 ‘괴사진’ 사건
괴사건의 배후
몰려드는 숭배자들

제2장 카리스마의 광채
기타 잇키라는 카리스마
궁내성 괴문서 사건 1
궁내성 괴문서 사건 2
호화로운 사생활
주고 은행 괴문서 사건
소장 군인들의 국가 개조 운동

제3장 계시와 예언
나카노 세이고라는 벗
다나카 기이치 내각 타도
1928년 파리 부전조약
‘통수권 침해’라는 귀신 들린 말 1
‘통수권 침해’라는 귀신 들린 말 2
‘통수권 침해’라는 귀신 들린 말 3
신불의 예언 《영고일기》

제4장 국가 혁명의 길
이시하라 간지와 기타 잇키
발각된 쿠데타 음모, 10월 사건
혈맹단 사건
미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경고
미일전쟁을 피하는 방법
해군의 쿠데타, 5ㆍ15사건

제5장 2·26사건 전야
2ㆍ26사건의 주역들
《개조법안》을 둘러싼 내부 대립
11월 20일 사관학교 사건
황도파와 통제파의 충돌
중ㆍ일 불화 중재 계획

제5부 기타 잇키 전설 (1935∼ )

제1장 2·26사건과 최후
구리하라 야스히데의 등장
육군 상층부 의중 탐색
궐기 전야 1
궐기 전야 2
눈 속의 2ㆍ26
혁명군이 아닌 정의군
기타 잇키 체포
궐기군에서 반란군으로
사이토 다카오의 ‘숙군에 관한 질문 연설’
사형 판결
“도련님에게 투구를 빼앗겨서 진 싸움”
사형 전야
아무도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

보론_ 기타 잇키의 아이들

제2장 기타 잇키의 긴 그림자
삶을 아름답게 그리려 한 예술가
사상에 목숨을 바치다
옥중 예언
기타 잇키 생존설
기타의 뼈를 먹은 사내

제3장 환상과 실상
민주 혁명의 전설
되살아나는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전후 신앙
기시 노부스케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기타 잇키
박열은 왜 기타를 찾아갔을까?

제4장 혁명 전설
낭만적 혁명가의 모습
미시마 유키오의 전략
전후 민주헌법의 모순
좌우 고정관념 너머의 존재
글을 마치며

후기
기타 잇키 연보
주요 인물
찾아보기(인명/용어)

교환 및 환불안내

도서교환 및 환불
  • ㆍ배송기간은 평일 기준 1~3일 정도 소요됩니다.(스프링 분철은 1일 정도 시간이 더 소요됩니다.)
  • ㆍ상품불량 및 오배송등의 이유로 반품하실 경우, 반품배송비는 무료입니다.
  • ㆍ고객님의 변심에 의한 반품,환불,교환시 택배비는 본인 부담입니다.
  • ㆍ상담원과의 상담없이 교환 및 반품으로 반송된 물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ㆍ이미 발송된 상품의 취소 및 반품, 교환요청시 배송비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ㆍ반품신청시 반송된 상품의 수령후 환불처리됩니다.(카드사 사정에 따라 카드취소는 시일이 3~5일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 ㆍ주문하신 상품의 반품,교환은 상품수령일로 부터 7일이내에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ㆍ상품이 훼손된 경우 반품 및 교환,환불이 불가능합니다.
  • ㆍ반품/교환시 고객님 귀책사유로 인해 수거가 지연될 경우에는 반품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 ㆍ스프링제본 상품은 교환 및 환불이 불가능 합니다.
  • ㆍ군부대(사서함) 및 해외배송은 불가능합니다.
  • ㆍ오후 3시 이후 상담원과 통화되지 않은 취소건에 대해서는 고객 반품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품안내
  • 마이페이지 > 나의상담 > 1 : 1 문의하기 게시판 또는 고객센터 1800-7327
교환/반품주소
  •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11 1층 / (주)북채널 / 전화 : 1800-7327
  • 택배안내 : CJ대한통운(1588-1255)
  • 고객님 변심으로 인한 교환 또는 반품시 왕복 배송비 5,000원을 부담하셔야 하며, 제품 불량 또는 오 배송시에는 전액을 당사에서부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