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베트남의사상인가
월남쌈이나 쌀국수 한 번 안 먹어본 이가 있을까. 가보지 않았어도 하롱베이, 다낭은 베트남에 있다는 것쯤은 상식이 되었다. 조금 나이든 이라면 베트남 전쟁을 먼저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전쟁이나 가난이라는 이미지 외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 아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사는 현재가 씨줄이라면 이들의 과거는 날줄에 해당한다. 그리고 베트남의 날줄은 우리와 같이 반만 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다.
그간 우리는 이들의 겉모습만을 봤을 뿐이다. 이들이 가진 저력은 ‘불변하는 하나’로 표현될 수 있다. 이 말은 대나무처럼 유연한 사유와 행동도 하나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불변하는 것으로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한다는 의미다. <베트남 사상사>에서는 베트남의 변함없는 뿌리, 그 사상에 대한 여정을 담고 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은 이들은 ‘베트남민주공화국’ 선포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 역시 16도선으로 국토가 강제 분할되는 역사를 겪어야 했다. 1954년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난 이들은 다시 미국과의 전쟁을 해야만 했다. 전쟁의 막바지 1970년대 초 각 분야의 학자들은 베트남의 사상의 뿌리, 불변하는 하나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20여년 동안 이들은 연구와 토론을 거쳐 1993년 <Lịch Sử Tư Tưởng Việt Nam> 1을 출판하게 되었다. <베트남 사상사>는 이 책을 완역한 번역서이다.
<베트남 사상사>는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최초의, 그리고 본격적인 베트남 사상서이다. 이들의 사상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의 삶과 문학, 역사 등을 읽을 수 있다. 특별히 중국과 일본, 미국이나 프랑스 등 베트남을 지배했던 혹은 지배하려 했던 근대 전후 열강의 목소리를 거치지 않았다. 우리가 직접 베트남의 육성을 듣는 것은 매우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Lịch Sử Tư Tưởng Việt Nam> 1의 집필한 이후, 베트남 철학계는 이에 대한 세부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은 베트남 철학의 논쟁사를 훑기보다 베트남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사상사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가게 한다. 베트남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물론 한국사상이나 통일에 관심이 있는 독자도 책의 곳곳에서 흥미로운 내용들을 접할 수 있다.
양분합적 사유와나라사랑-주의
<베트남 사상사>에서 언급된 베트남 사유의 특성 가운데 주목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양분양합적 사유’이며 다른 하나는 ‘나라사랑-주의’이다. ‘주의’를 잘 언급하지 않는 베트남 학계조차 ‘나라사랑’을 ‘주의’로 규정하고 사상사의 흐름에 놓인 빨간 실로 비유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중성 혹은 반대적 요소의 충돌과 화해를 나타내는 양분양합적 사유는 베트남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동 선(Đông Sơn) 문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라를 세운 이야기에서나 청동북에 새겨진 문양에도 역시 양분양합적 사유가 담겨 있다.
이 책은 고대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베트남 사상의 주요 흐름을 담고 있다. 선사 시기 유적과 유물에 담긴 사상에 대한 고찰이 먼저 등장한다. 그 다음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북방의 한(漢)과 당(唐) 등의 식민지배를 받던 북속(北屬) 시기의 사상 경향을 다룬다. 독립투쟁이 이어지는 중에 유교와 불교가 유입되어 베트남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후 한화(漢化)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은 딘(Đinh), 레(Lê), 리(Lý), 쩐(Trần), 레(Lê) 왕조를 거치면서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상의 흐름을 살펴본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삼교동원(三敎同源)의 사상으로 발전한다. 쩐 꾸옥 뚜언(Trần Quốc Tuấn, 陳國峻), 응웬 짜이(Nguyễn Trãi, 阮廌), 응웬 빈 키엠(Nguyễn Bỉnh Khiêm, 阮秉謙), 레 뀌 돈(Lê Quý Đôn, 黎貴惇), 응오 티 념(Ngô Thì Nhậm, 吳時任) 등 주요 사상가들도 따로 다루고 있다.
베트남을 더 알기 위하여
베트남은 우리와 공통점이 많지만, 그동안 문화적인 관심에 그쳤다. 우리나라에 베트남의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은 간간히 등장했지만, 사상사가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베트남이 하나되었듯, 우리나라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사상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남방정책이나 김정은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베트남의 도이머이 정책’ 등은 여전히 멀리 있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베트남에 관한 관심은 높아지는 대신, 알아보려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베트남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다. 이 책은 반만 년 동안 하나의 나라를 지켜온 베트남 민족공동체의 저력과 사상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들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상사를 떠올리면서 읽다보면 여러 곳에서 베트남 사상과의 진지한 만남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