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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도공 박은연구

평도공 박은연구

  • 박찬수
  • |
  • 경인문화사
  • |
  • 2019-03-22 출간
  • |
  • 354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88949947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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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조선 태종조는, 불교 국가였던 고려 왕조가 역성혁명으로 무너지고, 조선의 정치지도이념인 유교(儒敎)는 아직 정착되기 이전의 과도기였다. 고려 말기의 내우외환을 틈타 변방 무장 세력이던 이성계(李成桂)가 신유학(新儒學, 性理學)을 접한 일부 신흥사대부들의 지원을 받아 역성혁명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그는 불교이념이 지배하던 고려시대 사람이었고, 자신도 유학과는 거리가 먼 무인(武人)으로 독실한 불도(佛徒)였기 때문에 신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고려 말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성리학에 대한 이해도 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정도전(鄭道傳) 등 몇몇 개국 공신들에 의해 성리학이 새로운 왕조의 정치지도이념으로 채택되기는 했으나 유교 철학에 따른 정치기구의 개편이나 통치체제의 정비는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고려 말기 체제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통치조직 또한 고려 말부터 계승되어 온, 국가 최고 정책 결정 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고 있었다. 도평의사사는 ‘모든 군국 기무(軍國機務)를 평의한다.’는 명칭 그대로 수십 명의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로 구성된 합의체로서 군국대사는 물론 일반 국정에까지 관여하게 되니 능률적인 국가 운영이 불가능하였다. 이는 개국 초기의 불안한 정세 하에서 정치?사회적 안정이 급선무로 새로운 국가에 걸맞은 정치체제 개혁에는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은 말하자면 수성(守成)에 해당되는 군주였지만, 그 자신이 조선 왕조 창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획득한 왕위도 순
탄한 과정을 거쳐 얻어진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잔을 통한 정변의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태종의 집권과정은 창업 군주 못지않은 간난(艱難)의 연속이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골육상잔의 비극도 피할 수 없다는 권력의 속성을 체득한 태종은, 건국 초기의 임금 자리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 줄도 알게 되었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정(人情)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도 잘 알았다. 때문에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거의 병적일 정도였고, 그 결과 그가 채득한 신념은 더 이상 권력 쟁탈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태종의 미래 정치 구상은, 왕위가 안정적으로 순조롭게 계승되고 이렇게 구축된 강력한 왕권을 통해, 고려 말기부터 내려오는 폐정(弊政)을 일소하고 조선을 유교 통치이념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당초 당(唐)?송(宋)의 정치 체제를 모방한 고려의 정부조직이 무신정권과 몽고 간섭기를 거치면서 산만하고 비효율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 낡은 통치 기구를, 의정부와 육조(六曹) 중심으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즉위 직후,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고,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고 육조(六曹)를 승격, 강화하여 의정부?육조 중심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왕 중심 국가 경영 체제는 대략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태종이 일관되게 추진한 정책으로 그것은 후일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의 골간(骨幹)이 됨으로써 조선 왕조 오백년의 기틀이 되고 왕권 안정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정책 수행에 장애가 될 요소들은 가차 없이 제거되었다. 이로 인해 태종은 후세에 권력욕의 화신(化神)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이런 야심만만한 태종 치하에서는 변함없는 국정의 파트너로서 시종일관 자리를 보전한 신하가 별로 없었다.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된다면 과거의 어떤 공로나 인연도 고려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개국공신이나 친인척(親姻戚)도 예외일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더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국왕과 지근(至近) 거리에 있어 정권을 변동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
적인 위험 집단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태종의 집권에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던 민무구(閔無咎) 등 처남 4형제를 비롯하여 사돈인 심온(沈溫)과 동방 급제자였던 병조판서 박습
(朴習)은 죽음을 당했고, 공신 중의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이숙번(李叔蕃)을 필두로 이무(李茂)?조희민(趙希閔)?윤목(尹穆)?유기(柳沂)?이지성 등 수많은 공신이나 중신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공을 이룬 후 이를 끝까지 함께 공유하며 천수(天壽)를 누리기 어렵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태종 재위 기간 동안 친인척도 아니면서 시종여일 임금의 신뢰와 은총을 받으며 자신의 정치적 경륜을 소신껏 펴고 천수를 누린 네 정승이 있었으니, 곧 개국공신 조준(趙浚)과 남재(南在), 정사공신(定社功臣) 하륜(河崙), 좌명공신(佐命功臣) 박은(朴?, 1370~1422)이었다. 태종은 중요한 정치적 자문을, 초?중기에는 조준과 하륜에 의지했고, 말년과 태종이 상왕으로서 실질적인 국가권력을 좌우했던 세종 3년까지는 박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다. 태종의 박은에 대한 대우는 여느 군신(君臣) 관계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이고 융숭한 것이었다.
태종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한비자(韓非子)의 법가(法家)사상의 전범(典範)처럼 보이는 군주인데, 그가 정권을 쟁취한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체질화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태종이었지만 모든 국정을 독단으로 처리한 것은 아니어서 태종에게는 시기마다 의존한 인물이 있었다. 물론 자신이 정권을 잡는 데 헌신적으로 기여한 공신에 대한 특별한 예우야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많은 공신과 중신들이 사사(賜死)?폄출(貶黜)?투옥 당하는 상황에서 대소 국정을 함께 의논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은은 시종여일 태종의 신임을 받다가 마지막에는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녹훈되어 향수 53세로 생을 마감했고, 태종 또한 그 이튿날 56세로 승하했으니, 두 군신 관계는 가히 운명적이라고 할 만하다. 실제 태종 치세 20여 년을 통해 공신으로서 최고의 신임을 받아 시종이 여일했던 이는 하륜(河崙)과 박은이었다.
그런데, 태종과 박은의 특수한 관계를, 인물평에서는 “박은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서로 합치되게 하는 능력[?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물론 대인 관계에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신하의 운명이 임금의 말 한 마디나 기분에 좌우되는 전제정권하에서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천자문(千字文)에도, “벼슬살이할 때는 ‘깊은 물가에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듯[臨深履薄]’이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것 만이었다면 박은은 일개 아첨꾼 신하에 불과했고, 태종은 용렬한 군주의 이름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군신 간에는 보다 고차원의, 국가를 경륜하는 데 필요한 컨센서스[合致點]가 있었기에 변함없는 신뢰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박은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삼아, 조세 경감(輕減)과 백성 진휼(賑恤), 인명을 중시한 형률제도(刑律制度)의 개선 등 무한한 인간애(人間愛)와 원대한 국가 경륜(經綸), 탁월한 정치 실무 능력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이 때문에 권력욕에는 무자비했지만 국가 경영과 애민사상만은 투철했던 태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두 군신 간의 의기투합으로 박은의 정치 경륜은 상당 부분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어 건국 초기의 나라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흔히 세종이 설치한 것으로 알고 있는, 세종조 문화의 산실(産室)인 집현전(集賢殿)도 실은 박은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은에 대해서는, 태종이나 태종대의 정치를 논하면서 곁가지로 언급했을 뿐, 그의 정치 경륜이나 치적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특히 야사(野史)에서 흔히 운위되는, “박은의 넓은 도량으로 유량(柳亮)을 구원하여 유량이 감복했다.”든가, 세종(世宗)의 장인 심온(沈溫)이 죽으면서 “우리 후손들은 반남 박씨(潘南朴氏)와 혼인하지 마라.”고 유언하여 두 가문이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었다든가, “박은은 태종의 신임 하에 오랫동안 정권을 맡아 권력을 휘둘렀다.”든가, 박은은 “재상으로서 자기의 이해가 걸린 노비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든가 하는 다소 부정적인 인식만이 전해질 뿐이다. 이 책에서는 당시 사실의 일차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실록 등 실증 자료를 토대로 박은의 선세(先世)와 생애, 그 정치 경륜과 치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에서는 먼저 반남 박씨(潘南朴氏)의 득관(得貫) 유래와 선계(先系)를 고구(考究)하여 그 연원(淵源)을 밝히고, 고려 말 우왕 즉위 초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국내외 정치 상황 하에서 시종 친명
배원(親明背元) 정책을 고수하다가 4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반남공(潘南公) 박상충(朴尙衷)의 시문(詩文)을 통해 조선조에서 그 위상(位相)이 고양(高揚)된 이유와 경위를 살폈다. 따라서 이 장은 자료가 영성(零星)하여 독립 연구서를 꾸릴 수 없는 반남공(潘南公)의 생애가 되겠다.
제2장은 6세에 양친을 모두 여읜 고아의 몸으로 누구의 손에 양육되어 학문을 닦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出仕)한 후에는 역성혁명과 1?2차 왕자의 난이란 격변기를 거치면서 태종 이방원과의
인연이 어떻게 맺어졌는지를 검토했다. 그리고 태종이 즉위한 뒤에는 임금의 변함없는 신임을 받아 급기야는 재상의 지위에 올라 세종 3년 말까지 그 정치 경륜이 조선 초기 정치에 어떻게 투영되
었는가를 일별(一瞥)하였다.
제3장은 그 시문(詩文)을 통해 본 조은의 정치사상을 검토하고, 성리학의 성립과 전래 과정을 약술(略述)하였고, 제4장에서는 애민사상에 입각한 위민정치(爲民政治)의 구체적 사례와 치적을 통
해 그 정치 경륜을 사례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5장에서는 야사(野史)에서 전해지는 조은의 부정적 기록인 노비 소송 문제와 청송 심씨(靑松沈氏)와의 문제를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관련 설화
의 실체를 구명함으로써 박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목차


머리말

제1장 가계(家系)와 선대(先代)
Ⅰ. 박은(朴?)의 선세(先世) 가계(家系)
1. 반남박씨(潘南朴氏)의 득관(得貫)
2. 조은(釣隱)의 선세(先世)
Ⅱ. 아버지 박상충(朴尙衷)
1. 반남공 박상충의 생애와 시문(詩文)
2. 청각북원사소(請却北元使疏) 문제
3. 반남공 박상충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추숭(追崇)

제2장 조은(釣隱) 박은(朴?)의 생애와 사환(仕宦)
Ⅰ. 생장과 수학(受學)
1. 고아(孤兒)로 자라나서
2. 생장과 수학(受學)
Ⅱ. 조은 박은의 관직 생활[宦歷]
1. 급제(及第)와 출사(出仕)
2. 태종(太宗) 이방원과의 관계
3. 태종 잠저(潛邸) 시기의 박은
4. 태종조의 조은
5. 양왕 체제(兩王體制) 하의 조은

제3장 시문(詩文)에 나타난 조은의 정치이념(政治理念)
Ⅰ. 시문(詩文)을 통해 본 조은(釣隱)의 생각
1. 시(詩)
2. 전시(殿試) 책문(策文)
Ⅱ. 유교정치이념(儒敎政治理念)
1. 성리학(性理學)의 발생과 개념(槪念)
2. 성리학 수용(受容)과 역성혁명(易姓革命)
3. 백성을 위한 정치[爲民政治]

제4장 민본 사상과 정치 경륜
Ⅰ. 애민(愛民) 사상과 위민(爲民) 정치
1. 형률제도(刑律制度)의 개선
2. 진휼 정책(賑恤政策)
3. 융통성 있는 원칙주의자
Ⅱ. 정치 경륜(政治經綸)과 치적(治績)
1. 사전(私田)의 하삼도(下三道) 이급(移給) 문제
2. 기인제(其人制) 폐지 건의
3. 노비 쟁송(爭訟) 문제점의 개선
4. 보충군(補充軍) 문제
5. 집현전(集賢殿) 설치 건의
6. 행정(行政)의 달인(達人)
7. 화민성속(化民成俗)
8. 사관(史官) 추천제 개선

제5장 조은에 대한 세평(世評)의 진실
Ⅰ. 노비 송사(訟事) 문제
1. 노비라는 신분(身分)
2. 태종을 격노케 한 사건
3. 노비 소송의 전말
Ⅱ. 심온(沈溫)의 유언(遺言) - 반남 박씨(潘南朴氏)와 혼인하지 마라

부 록 연보(年譜)
Ⅰ. 문정공(文正公) 휘 상충(尙衷) 연보(年譜)
Ⅱ. 평도공(平度公) 휘(諱) 은(?) 연보(年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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