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산도가 독도인가?
저자가 5년 전에 우려한 바 있듯이, 독도에 관한 잘못된 지식이 학자의 이름으로 강력하게 퍼지고 있다. 옛 문헌에 기록된 독도를 일컫는 이름인 우산도를 ‘환상의 섬’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실록 등 사료와 문헌, 지도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전문 지식을 근거로 지리지 편찬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우산도의 실재를 조명한다. 『태종실록』에서 무릉도를 우산도로 잘못 적은 것을 『세종실록』의 기사로 바로잡은 것이나, 『신찬팔도지리지』 기록 단계에서부터 ‘2도설’이 아니라 우산과 무릉 2도라는 ‘사실’을 기술해 나갔음을 증명해 나간다. 특히 실측 기술의 한계로 말미암아 우산도 위치가 〈동국지도〉 단계에 와서야 제자리를 찾는 지도 변천 과정의 생생한 소개는 울릉도 서쪽의 독도 지도만을 증거로 드는 이 교수의 단편적인 사료 취합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린다.
일본 측의 영유권 논리
이 교수의 주장이 일본 학자들의 논리와 닮았다는 기시감은 이 책 여러 군데에서 언급된다. 태정관 문서에 대한 이 교수의 변이 그 일례이다. 이 교수는 태정관 지령의 ‘일도’가 독도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는 시모조 마사오 등 다케시마문제연구회 일파들의 주장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태정관 지령을 인정하면서도 1905년에는 일본이 ‘선점’하여 유효한 영유권을 취득했다는 쓰카모토 다카시의 논리처럼, 이 교수도 그 시점에 일본 내각이 독도를 편입했으므로 태정관 지령의 구속성을 미미한 것으로 본다. 이에 저자는 지령의 성립 경위와 법령으로서 태정관 지령의 효력을 밝혀 논박한다. 이는 저자가 태정관 지령 전후 일본 사료를 샅샅이 훑어 왔기에(『일본 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각의 결정에 따른 편입 운운은 무주지 선점론으로서, 일본 측이 함께 내세우고 있는 고유영토론과 상충되는 모순임을 꼬집는다. 이 교수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인의 독도 실효 지배 증거가 없다면서 무주지 선점론을 정당화하고 있으나 그 반례는 많다. 두 나라 사람들이 독도에서 강치를 잡았을 때 1902년 울릉도 거주 일본인은 울도군에 납세하였으나(〈울도군 절목〉), 시마네현 사람들은 1906년이 되기 전까지 자국에 납세하지 않았다.
한국인 삶에 녹아 있는 독섬=석도=독도
무주지 선점론의 취약함을 보여 주는 사례는 〈울도군 절목〉 이외에 1900년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도 있다. 이 칙령은 1905년 이전 대한제국이 울도군을 관할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울도군의 관할 범위를 언급한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에서 석도가 관음도라는 일본 측의 주장을 반복한다. 그러나 한국 학자뿐만 아니라 오니시 도시테루 등 일본 학자까지 지적한 대로(『우리 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석도=우산도, 석도=독도이다. 저자는 1900년 전후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돌섬을 뜻하는 우리말 ‘독섬’으로 불렀고, 그 뜻과 소리에 따라 각각 석도, 독도로 표기되었음을 『한국지명총람』 등 언어학적·문헌학적 자료로 입증해 나간다. 돌을 독으로 불렀던 우리네 생활언어 추적을 따라가다 보면 왜 독섬이 독도가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울릉군만이라도 아름다운 우리말 땅이름을 되살리자는 저자의 생각도 납득이 가게 된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지만 그 논거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또 우산도, 석도가 독도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독도(우산도)가 환상이라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억설이지만, 우리 안에 과연 제대로 된 독도상이 정립되어 있는가 반문하게 만든다. 이 논쟁을 계기로 정확하고도 바른 독도 이미지를 확립해 나가는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때마침 우리 땅 독도의 실체를 ‘발견’하게 돕는 이 책은 소모적인 논쟁을 뛰어넘어 독도 문제를 비로소 직시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