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북한 민중이 걸어온 삶의 재구성
2000년 즈음 평양에 선술집이 생기면서부터 평양의 근로자들은 퇴근 후 선술집에서 동료들과 함께 소주 한잔으로 피로를 풀곤 한다. 소주를 마시며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도 하고 자식 자랑을 하기도 한다. 한편 북한 주민들은 보통 서로 동무 또는 동지라고 부르는데, ‘선생’이라고 부르는 직업이 셋 있다. 교사와 의사, 법관으로,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북한 사람들은 자녀들이 이러한 직업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교육에 열심이다.
남한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평소 생각하던 북한에 대한 이미지와 달라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렇듯 북한 사람들의 일상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 후 남에는 미군,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남과 북 사람들의 삶은 달라졌다. 다른 체제 속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지배층도 다르고, 그 지배층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층, 즉 민중의 삶도 달랐다. 남쪽의 민중이 해방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각도로 진행되어 왔지만, 한반도의 반쪽 북한의 일반인, 민중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 연구가 권력과 상부 구조를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북한 체제 속 인간의 삶에 대한 연구는 불모지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북한의 역사를 주민들의 일상생활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한다. 먹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 왔는지, 옷과 집은 어떤지, 여가는 어떻게 보내고,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아플 때 치료는 어떻게 받는지 등등 일상적인 부분들을 통시적으로 각 시대별로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주민들의 실제 생활 모습을 시대 변화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지난 70년의 북한 역사를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주민 생활의 변화뿐만 아니라 북한의 상부 구조에서 진행되어 온 논의와 정책, 제도들이 북한 사회에 어떻게 체화되어 왔는지, 또 상부와 하부의 괴리는 어느 지점에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의 경험을 통해 북한 사회 구조의 실상을 더 명확히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그동안의 권력 중심, 정책 중심, 상부 구조 중심의 접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의 관점에서 북한 역사 70년 개괄
이 책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2010년대까지 북한 역사 전체를 다루고 있다. 북한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 9일 이후를 공식 북한 역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해방 직후 북한 체제 성립을 위한 공간도 이후 역사와 직결되어 있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조치들은 북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역사 서술의 시작은 해방 직후부터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모습까지 파악하는 것이 북한 주민 삶의 총체적인 변화상을 파악하는 길이므로 2010년대까지의 북한 주민의 일상사를 기술했다. 특히 북한 체제가 형성되는 시기인 1940년대와 1950년대 민중생활의 실제를 파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체제 형성기에 대한 깊은 탐구가 이후 역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70년 역사 동안 북한의 민중도 정부도 인민생활의 향상이라는 기본적인 목표를 갖고 움직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민중들은 해방 직후 소작료 인하 투쟁을 벌였고 토지개혁을 요구했으며, 노동자와 여성들은 민주개혁을 호소했다. 이후 오랫동안 농장과 공장, 어장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민중들은 성과를 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물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은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이라는 대의에 봉사한다는 의식도 가졌을 것이다. 북한 정부도 사회주의 체제의 완성과 인민생활의 향상을 동시에 추구하며 다양한 정책을 실행해 왔다. 그런데 실제 북한 민중들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물론 해방 직후에 비하면 많이 향상했다. 하지만 70년의 인민생활 개선 역사치고는 향상의 정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다. 농민, 노동자, 어민, 여성, 군인을 막론하고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실증 자료를 활용한 생생한 연구
저자는 북한 민중의 삶을 살피기 위해 많은 자료를 활용했다. 북한 체제 형성기인 1940년대와 1950년대 민중 생활의 실제를 파악하기 위해 미국 현지조사를 실시했는데, 미국 문서기록보관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과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에서 많은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미국 문서기록보관청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 지역에서 수집한 것으로, 통상 ‘노획문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자는 상자로 1,200여 개에 이르고 목록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은 신·구 노획문서를 모두 검토해 북한 민중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발췌하고 문서와 문서를 대조하면서 당시 북한 민중들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데 활용했다.
이 밖에 북한의 다양한 기관이 발행해 온 정기 간행물(『활살(화살)』, 『조선여성(조선녀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공보』 등), 북한의 기관지(『로동신문』, 『민주조선』), 북한에서 발간된 단행본 자료(『조선전사』, 『조선중앙연감』, 『인민들 속에서』 등), 북한 경험자들의 수기, 탈북자의 증언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방대한 작업을 통해 북한 민중들의 생활을 깊이 있게 파악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