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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행복론

명상록 행복론

  •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세네카
  • |
  • 범우
  • |
  • 2021-07-10 출간
  • |
  • 330페이지
  • |
  • 153 X 225 mm
  • |
  • ISBN 978896365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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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아우렐리우스와 《명상록》에 대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minus, 121~180)의 원래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가틸리우스 세베루스로, 121년 4월 26일 안토니누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토니누스 베루스는 로마의 두번째 왕인 누마(재위 B.C. 715~673)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집정관의 지위에 있었으나 마르쿠스가 아홉 살 때 죽었다. 어머니는 로마의 유복한 여자 상속인의 한 사람으로, 두 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카탈리우스 세베루스의 손녀였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마르쿠스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도 역시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을 지낸 사람이었다.
마르쿠스는 어릴 적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귀염을 받았다. 성인식을 올린 후 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으로 당시 집정관이었던 명문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도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을 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마르쿠스와 파비아의 약혼을 파기하고 자기 딸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키고 이듬해 140년에는 재정관, 다음 해에는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145년에는 결혼을 시켰다. 마르쿠스는 열 살 때부터 스토아적 교양을 쌓기 시작했고 열한 살 때는 짚으로 만든 침대에서 모피를 사용하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의 신체는 섬세하고 연약했으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스포츠에 뛰어나 복싱, 레슬링, 달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가정생활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내나 자식을 사랑했으며 어머니를 공경했다. 어릴 적에는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의 경건함은 중년에 이르러서 깊은 종교적 정열로 변하는데, 이것은 어머니의 감화 때문이었다. 그와 아내 파우스티나 사이에는 열세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쌍둥이도 몇 쌍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정숙하지 못했다고 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측근들을 불러놓고 정식으로 마르쿠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61년 3월 7일 피우스 황제가 죽고 마르쿠스가 즉위했다. 황제로 즉위한 후의 마르쿠스의 생활은 다난하여 몇 번의 전쟁을 치렀다.
그는 “철학자가 지배하든지, 지배자가 철학을 하든지 해야만 나라가 번영한다”는 플라톤의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철인왕(哲人王)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근본 사상은 어디까지나 스토아 철학이었고 스토아적 세계 시민, 스토아적 박애였다. 그러나 로마는 대국이기는 했지만 한 나라임에는 틀림없었고, 그는 현실적으로 로마라는 한 나라의 왕이었다. 결국 스토아적인 것은 그의 이상, 그의 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번민하면서도 스토아적 정신에 바탕을 두고 바르게 처신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고 공공의 일을 위해 사재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80년 마르쿠스 황제는 북방의 전투에서 돌아오던 중 페스트(?)에 걸려 엿새를 앓고, 3월 17일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지금의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르쿠스의 저서로는 《명상록》이 남아 있는데, 이 《명상록》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수기다. 그 밖에 연설, 원로원에 전한 말, 유언, 명언, 편지 등이 약간 남아 있다. 《명상록》은 그가 정무 중이나 혹은 싸움터에서 틈을 내어 쓴 것으로, 전 12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의 각 절은 모두 짧고 어느 것에나 체험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제1장을 제외하고는 개인적 기록이 아니다. 또한 체계적으로 12장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쓰다 보니까 12장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의 사상은 후기 스토아의 특색대로 매우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다. 《명상록》을 읽으면 그가 자연계의 사물 하나하나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것을 예술품 못지 않게 훌륭하다고 찬양하면서도, 그 기조는 애수어린 무상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생성했다 소멸하게 마련이다. 장군도, 의사도, 부자도, 황제도, 생사를 초월했다는 철학자도 죽고 도시는 폐허가 되며 동상은 부서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는 이러한 운명 앞에서 체념하고 쫓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결국 그의 근본사상도 마음이 전부라는 사상으로 집약되는 것이다. 내면으로 파고들라-- 샘은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우주의 로고스의 분신으로 우주와 상통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코스모폴리탄적 입장에서 박애와 인류애를 강조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토아 철학은 인간 중심의 사상이라는 일면을 갖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 이 박애는 더욱 현저하다.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특성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기독교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결코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받은 교육은 전적으로 그리스적이었고 스토아적이었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의 박해자였다. 그의 인류애와 박애는 기독교와는 근원이 달랐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플라톤과 차이가 있다. 플라톤에게는 인류애나 세계 시민이나 박애 사상은 없었다. 플라톤은 단지 한 나라를 강하게 하고 잘 다스리는 것이 문제였지, 적을 사랑한다든지 박애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는 무사 계급이 있고 따라서 국방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의 입장에서는 국방이나 군인은 있을 수 없다. 스토아 철학은 사해동포(四海同胞)와 세계 시민을 강조하며,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에는 적조차도 동포처럼 사랑하려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는 적을 사랑하고 세계 시민을 말할 수 있어도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국경을 지키고 영토를 넓히기 위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진두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궁정(宮廷)과 철학을 계모와 친모에 비교한 바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이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틈에 끼여 고뇌하는 인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우리는 《명상록》에서 이러한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네카와 《행복론》에 대하여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A.D. 65)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로서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스페인의 코르도바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세네카의 가계는 안네우스라는 무사의 집안으로, 웅변가이던 아버지 세네카와 어머니 푸르비아 사이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자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흔히 아버지를 웅변가 세네카라고 부르고 아들은 철인 세네카라고 부른다.
세네카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로마로 이주했다. 로마에서 세네카는 수사학을 공부했으나 차츰 철학 방면에 소질을 보였으며 특히 윤리 도덕에 남달리 취미를 갖고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세네카의 이러한 학구열을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고 법률을 공부하여 후일 원로원에 진출할 기반을 닦게 하였다.
그 후 세네카는 원로원에서 고매한 인격과 격조 높은 웅변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황후 메사리나의 참소로 코르시카 섬에서 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메사리나와 이혼하고 아그리피나가 새로 황후가 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아그리피나가 데려온, 전 남편의 아들의 개인 교수가 되었다. 이 아들이 장성하여 유명한 폭군 네로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권력과 선(線)이 닿게 되자 세네카는 원치도 않는 출세가도를 달려 집정관(執政官)의 중책을 맡게 되었으며 황제와 황후의 특별한 배려로 막대한 재산까지 손에 굴러 들어와 사람들의 선망과 질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제자이던 네로가 54년에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로마의 실권은 사실상 세네카의 수중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네로는 치세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폭군으로 변해 세네카를 차츰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네로를 제거하려던 음모 사건에 세네카가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세네카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세네카의 애처 파우리나는 남편과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 사형 집행인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자 세네카도 이에 동의했다. “우리가 함께 죽을 결심을 한 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꺼이 죽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내 아내의 이름을 길이 기억할 것이다” 하고 세네카는 말했다 한다. 이리하여 세네카는 62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시체는 유지(遺志)에 따라 장례도 치르지 않고 그대로 화장되었다.
세네카는 플라톤이나 견유 학파와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영혼과 육체의 구별을 강조하여 스토아 학파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철학이란 덕을 행하는 처세의 학문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을 따르는 데 있으며, 이 이성에 따르면 자연의 도에 일치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신을 만물의 제1원인으로 보고, 신의 의지가 세계의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육체의 속박을 떠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어디서 구원을 받을 것인가?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창조는 신의의 명령을 확인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는 신을 우리의 지배자 내지 지도자로 모시고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
세네카의 《행복론》은 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삼라만상 가운데 인과관계가 가장 긴밀한 것은 행복과 덕성의 관계이며, 덕성이 있는 곳에 가장 자연스러운 행복이 조성되고, 행복이 있는 곳에 언제나 덕성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훌륭한 것은 날을 얼마나 예리하게 다듬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결코 칼집이 얼마나 찬란한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존귀하게 하는 것은 돈이나 그 밖의 소지품이 아니라 그 사람의 덕성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인간은 자연 그대로 사물을 보지 않고 그릇된 견해를 받아들여 거의 모든 사물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재물과 명예와 권력 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네카의 주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죽음에 대한 추구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죽음의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기꺼이 맞이해야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의 이면에는 내세에 대한 기대 내지 소망을 엿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인생은 영원에 이르는 서곡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삶이 끝난 곳에 우리는 타계의 시원(始原)을 기대할 수 있으며 거기서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 이 현세에서 우리는 단지 먼 거리에서 방황하게 될 뿐 천국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신관(神觀)은 너무나 단순하며 이성으로 죽음을 해명하여 종교적인 차원에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부귀와 영화의 절정에 이른 그가 평소에 끝까지 자기 철학에 투철하여 검소하고 순박한 생활로 일관한 데서 실천적인 철인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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