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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목간총람

한국목간총람

  • 윤재석
  • |
  • 주류성
  • |
  • 2022-01-31 출간
  • |
  • 616페이지
  • |
  • 192 X 243 X 47 mm /1411g
  • |
  • ISBN 978896246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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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이 책은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동아시아 기록문화의 원류와 지적 네트워크 연
구’의 1단계 사업의 성과로 간행되는 동아시아 목간 총람중 한국 목간 편이다. 여기에 수록된 목간은 2021년 말까지 발굴과 사후조사 등을 통해 알려진 것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낙랑의 간독자료부터 백제와 신라(통일신라 포함), 고려와 조선시대 및 원대(신안선 목간)의 자료까지 포함하여 시대순과 국가별로 38개 유적에서 출토한 1,100여 점의 목간들을 대상으로 서술하였다.

목간은 公私의 의지 혹은 정보 전달 등을 목적으로 나무조각[木片]에 문자를 기록한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지역에서 書寫재료로서 나무를 이용하는 방법은 중국에서 기원하였다. 중국에서는 竹簡·木簡을 비롯한 붓과 먹 등의 文房具類가 戰國時代의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秦漢시대에 이르러 국가행정의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다가 이후 종이의 개량과 보급에 따라 점차 서사재료로서의 주도적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렇듯 나무를 서사재료로 이용한 문자문화의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지만, 고대 한국의 문자 사용과 목간문화의 기원 및 전개는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고대 한국에 중국의 간독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계기는 前漢 武帝가 古朝鮮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서북부에 郡縣을 설치한 이후라고 생각된다. 樂浪을 비롯한 군현의 설치는 중국 내지에서와 같은 문서행정에 기반한 군현제적 지배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였으며, 처음 한사군을 설치할 때 군현의 屬吏를 遼東郡에서 충원하였다는 것은 군현 지배를 뒷받침하는 간독의 문서행정 시스템을 바로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평양의 채협총 출토 목간과, 정백동 364호분 출토 樂浪郡 戶口簿 木牘·『논어』 編綴竹簡, 낙랑 유적에서 출토한 封泥와 印章, 문방구류 등의 문자 유물의 존재는 이같은 의도가 현실에서 구현되었음을 의미한다.
낙랑군의 간독과 문자유물의 존재는 고대 한국에 중국의 간독문화가 그대로 유입되어 수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한국의 목간자료에서 볼 때 중국 간독문화와 한국 목간문화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우선 한국 목간에서 죽간이 확인 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중국의 간독이 지배적인 서사재료로 사용되었던 시기와 한국의 고대 목간이 유행하던 시기의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나아가 한국의 목간과 중국의 간독은 형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목간문화가 중국의 간독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나름대로 변용시켜 소화하였음을 말해준다.

고구려는 중국 군현과의 직접 마주하며 교류하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언어와 문
자를 통한 교류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다. 기원전 82~75년경 貊人의 공격으로 蘇子河 방면으로 옮겨간 玄?郡은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여러 집단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주변 집단들은 현도군의 치소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았으며 고구려領(令)이 그 名籍을 주관 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漢 군현 세력과의 교류 속에서 한자를 사용하는 문서행정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초기의 문서행정은 사람이나 물품의 이름과 그 수량 및 날짜 정도를 표기할 수만 있어도 가능하다. 『魏書』 동이전 고구려조에 諸加들이 가신처럼 임명한 使者·?衣先人의 이름을 모두 왕에게 보고하였다는 것도 초기 문서행정의 양상이었다고 생각되며, 이 과정에서 서사재료는 목간이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흐름은 중국 군현이나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가던 백제 및 신라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미 백제의 경우 漢城시대인 근초고왕대에 書記의 제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으며, 北魏에 보낸 蓋鹵王의 국서나 編戶小民의 기록에서 한성백제 후반기에는 이미 일정 수준의 행정적 문자문화를 향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또한 麻立干期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경험하면서 문자와 법령에 의한 국정운영을 목도했을 것이며 5~6세기 경주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지배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문자를 활용하여 국가를 경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이도 쓰였을 것이지만, 행정 일선 현장에서의 주된 서사재료는 ‘목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알려진 백제와 신라의 목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6세기 능산리 목간(백제), 월성해자·성산산성 목간(신라) 등인데, 죽간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처음 중국의 간독문화가 유입된 한반도 서북부의 자연환경적 요인
과 고대사회가 정치사회적으로 미성숙했던 환경은 죽간이 배제된 ‘목간’의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한국 고대 목간문화의 기원적 특징이라고 지적해 두고 싶다. 결국 중국의 간독문화에서 죽간문화가 배제된 목간문화의 수용은 이후 고대 한국 목간문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나아가 일본 목간문화의 기원과 전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죽간이 배제된 목간의 문화는 고대 한국의 특징적인 단독간 문화로 발전하는데, 다면체와 원주형 목간은 한국 고대 목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보다 많은 내용을 서사할 필요가 있는 문서 목간이나 장부·전표 등의 기록 목간 등에 사용되었다. 문서의 授受관계가 확인되는 문서와 기록류의 목간을 크게 문서 목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다면·원주형 목간은 주로 문서목간이 필요한 곳에서 사용되었다. 나아가 글자를 연습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다면 혹은 원주형 목간에 형태상의 변형을 더하여 주술 용도의 목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목간이 6세기 이후의 자료라는 점과, 이 시기는 종이가 이미 함께 사용되었던 紙木竝用期라는 관점에서 紙木竝用期에 접어들면서 그 이전 시기에 사용되던 편철간이 사라지고, 다면·원주형 목간이 편철간이나 종이의 대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서사재료의 변화와 종이의 문서행정이 제도화되면서 목간의 정형화·규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면·원주형 목간은 7세기 후반 이후 문서의 서사재료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면서 부차적인 서사재료로 활용되었다. 나아가 고대 한국의 다면·원주형 목간은 백제와 신라 목간에서도 미묘한 변화와 차이점이 확인되고 있다. 백제 목간은 6세기의 능산리 목간 단계에서는 다면·원주형 목간이 어느 정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만, 7세기 단계가 되면 특히 기록류의 문서 목간에서는 가늘고 긴 長方板形의 양면 목간이 다면·원주형 목간을 대체하고 있는 현상이 확인된다. 이 시기 백제의 문서 목간은 장방판형 목간의 사용이 어느 정도 규격화 및 정형화되어 다면·원주형 목간을 대체해 갔다. 궁남지 출토 서부후항 목간과 부여 쌍북리 출토 좌관대식기 목간이 이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목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7세기에도 다면·원주형 목간이 문서목간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에서 백제의 목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나아가 꼬리표 목간의 형태와 서사 기법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확인된다. 백제의 꼬리표 목간은 글자를 쓰는 윗부분에 홈을 새기는 경향이 있었으나, 신라의 경우 주로 아래쪽에 홈을 새긴 꼬리표 목간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향은 통일 이후가 되면 신라에서도 목간의 윗 부분에 홈을 새기는 방향으로 꼬리표가 주로 제작되었다. 또 7세기 백제 꼬리표 목간에는 아래위 모두 홈을 새기는 꼬리표 목간이 확인되기도 한다.
이같은 현상은 백제와 신라의 목간문화가 국가 간의 문자문화의 기원과 전개 과정에서의 차
이와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한국의 목간문화는 중국 간독문화의 영향에서 출발하였지만 정치사회적·자연적 환경의 차이로 말미암아 고대 한국의 목간문화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내부적으로도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지역적·국가적 차이를 보이면서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7세기 이후의 자료들이 알려지고 있는 고대 일본의 목간들과 비교했을 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죽간은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곧 고대 한국의 목간문화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나아가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문서 목간의 형태는 단책형이라고 불리는 얇은 장방판형 목간인데, 그 형태는 7세기 백제의 문서 목간과 매우 유사하다. 꼬리표 목간 또한 백제의 그것과 유사한 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점에서 고대 일본의 목간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은 7세기 이후 백제의 목간문화였다.

이렇듯 고대 한국의 목간문화는 고대 중국에서 기원한 간독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이며 특징적인 목간문화를 전개시켰으며, 고대 동아시아 지역 목간문화의 수용과 변용 및 전파의 문제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위상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 한국에서 7세기 중후반 이후 신라가 삼국의 통일을 완수하면서 목간의 시대는 종이의
시대로 점차 변모한다고 생각된다. 목간의 시대에서 종이의 시대로의 전환은 문서행정의 변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통일신라의 관제가 정비기를 거쳐 완성기에 도달하면서 문서행정상에도 일대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 사실은 통일 이후 675년(문무왕 15) 百司와 州郡에 銅印을 주조해 나누어 주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든 관부와 지방의 주군에 이르기까지 印章을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은 중앙과 지방행정 과정에서 종이문서에 捺印하는 정책의 시행을 의미하며, 이는 종이문서의 전국적인 사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문자생활의 현장에서 서사재료가 종이로 변화했던 것은 아니다. 경주 안압지·황남동 출토의 꼬리표와 기록 목간, 김해 출토 논어목간, 경주 전인용사지와 창녕 화왕산성 출토 呪術목간의 존재는 통일 이후에도 목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라 下代인 眞聖女王 때의 居陀知설화에서도 목간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문서행정의 주요 영역에서는 서사재료가 목간에서 종이로 변모하였지만, 문자가 요구되는 다양한 장면에서는 각각의 용도에 걸맞는 서사재료의 특질이 고려되어 선택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인 종이문서나 장부를 만들기 위한 중간 집계나 기록들, 물품의 이동·보관 등에서는 문자 기록의 내구성이 요구되는 목간이 이용되었고, 주술이나 의례의 이미지를 형상화할 때에도 목간이 주로 활용되었다.

목간은 고대 국가 내부적으로 문자의 사용이 시작되면서 주도적인 서사재료로 사용되다가, 7세기 이후 본격적인 종이의 문서행정이 전개되면서 서사재료의 주도적인 지위가 목간에서 종이로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목간은 나무라고 하는 재질상의 특징을 활용하는 용도로 점차 한정되어 갔다. 목간은 고대국가 전 시기에 걸쳐 문자문화의 중요한 서사재료로 활용되었으며, 종이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재질상의 특징에 걸맞게 고대국가 내부적으로 다양한 장면에서 사용되면서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역할을 했다.


목차


발간사
서문
원색사진
일러두기
한국 목간 분포 현황

Ⅰ. 낙랑(樂浪)
개요
1. 평양 석암리 194호분 출토 죽간
2. 평양 남정리 116호분 출토 목독
3. 평양 정백동 3호분 출토 목간
4. 평양 락랑동 1호분 출토 목간
5. 평양 정백동 364호분 출토 간독

Ⅱ. 백제(百濟)
개요
1. 부여 구아리 319번지(중앙성결교회) 출토 목간
2. 부여 관북리 출토 목간
3. 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
4.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
5. 부여 쌍북리 뒷개 유적 출토 목간
6. 부여 쌍북리 현내들 유적 출토 목간
7. 부여 쌍북리 56번지(사비한옥마을) 유적 출토 목간
8. 부여 쌍북리 102번지(쌍북아파트) 유적 출토 목간
9. 부여 쌍북리 173-8번지(119안전센터) 유적 출토 목간
10. 부여 쌍북리 184-11번지(부여 사비 119 안전센터) 유적 출토 목간
11. 부여 쌍북리 280-5번지(신성전기창고) 유적 출토 목간
12. 부여 쌍북리 201-4번지(농업시설) 유적 출토 목간
13. 부여 쌍북리 328-2번지(단독주택) 유적 출토 목간
14. 부여 석목리 143-16번지 유적 출토 목간
15. 금산 백령산성 출토 목간
16. 나주 복암리 유적 출토 목간
17. 정읍 고사부리성 출토 목간
18. 부여 동남리 216-17번지(개인주택) 유적 출토 목간

Ⅲ. 신라(新羅)
개요
■ 왕경 출토 목간
1.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
2. 경주 월지(안압지) 출토 목간
3. 경주 황남동 376번지 유적 출토 목간
4. 경주 傳인용사지 출토 목간
5.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출토 목간
6.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남측부지(영남권수장고 동쪽부지) 유적 출토 목간
7. 경주 황룡사 남측 도로(남측 담장 외곽 정비사업부지) 유적 출토 목간
8. 경주 傳황복사지 출토 목간
■ 지방 출토 목간
9.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
10. 경산 소월리 유적 출토 목간
11. 하남 이성산성 출토 목간
12. 서울 아차산성 출토 목간
13. 김해 양동산성 출토 목간
14.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목간
15. 인천 계양산성 출토 목간
16. 부산 배산성 출토 목간
17. 창녕 화왕산성 연지 출토 목간
18. 남원 아막성 출토 목간
19. 안성 죽주산성 출토 목간
20. 익산 미륵사지 출토 목간
21. 장수 침령산성 출토 목간
22. 대구 팔거산성 출토 목간

Ⅳ. 고려(高麗)
개요
1. 태안 대섬 침몰선(태안선) 출수 목간
2. 태안 마도 1호선 출수 목간
3. 태안 마도 2호선 출수 목간
4. 태안 마도 3호선 출수 목간
5. 울산 반구동 유적 출토 목간

Ⅴ. 조선(朝鮮)
개요
1. 태안 마도 4호선 출수 목간
2. 여주 파사성 출토 목간

Ⅵ. 신안선(新安船)
개요
1. 신안 도덕도 신안선 출수 목간

부록 1. 한국 목간 연구 논문 목록
부록 2. 한국 출토 목간 일람표
부록 3. 한국 목간 연표
부록 4. 목간번호 조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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