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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전염병

제국주의와 전염병

  • 짐다운스
  • |
  • 황소자리
  • |
  • 2022-06-30 출간
  • |
  • 384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9119129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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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노예무역이 한창이던 18세기 말, 아프리카 서부해안에서 강제로 노예선에 실린 한 남자가 죽기로 작정했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 기구한 운명에 맞서던 남자는 어쩌다 손에 넣은 칼로 자기 목을 수차례 그었다. 배에 실린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뜬 남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삶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839년, 영국 내과의사 로버트 톰슨이 이 이야기를 의학 잡지 〈랜싯〉에 실었다. 톰슨은 이 사람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 배에 탔던 의사 트로터가 1790년대 영국 의회 청문회에 나가 증언한 내용 중 일부를 인용했을 뿐이다. 톰슨은 이 남자의 죽음을 인간이 먹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썼다. 톰슨은 이 노예선을 덮쳤던 질병이나 노예무역의 잔인함에 대해 잘 알았지만, 그건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단곡斷穀 상태’에서 인간이 얼마나 생존하는지 연구하던 톰슨에게는 오로지 노예로 팔려가던 한 남자가 먹지 않고 열흘이나 버텼다는 증거만이 중요했다.

# 엄마 손을 잡고 흙먼지 날리는 큰길로 접어든 흑인 아이는 왈칵 닥쳐온 두려움에 눈물을 훔쳤다. 앞쪽 히코리 나무 아래 백인 남자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예인 두 모자母子의 소유주와 의사였다. 소년이 도착하기 무섭게 의사는 가느다란 아이의 팔뚝을 날카로운 칼로 찔러 상처를 내고는 준비해온 천연두 ‘딱지’를 피가 나는 살갗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천연두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염 안 된 아이의 몸을 이용해 다량의 ‘깨끗한 백신’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남북전쟁은 발발했고 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적이 출현한 상태였다. 천연두였다. 에드워드 제너가 백신 접종법을 개발한 후였지만 무섭게 퍼지는 질병을 감당할 물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위기상황에서 남군의 의사들은 퇴행적인 대안을 떠올렸다. 인두법이었다. 백신 채취에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들에게는 제약 없이 사용해도 좋은 깨끗한 몸이 있었다. 어린 흑인 노예들이었다. 심지어 의사들은 엄마 품에 안긴 영유아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그 작은 몸이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고열로 신음할 때, 의사들은 백신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진통을 겪으며 고름을 만들어낸 아이의 온몸에는 평생 갈 흉터와 파인 자국이 남았지만,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기록이나 장부에도 실리지 않은 탓에 남북전쟁을 연구하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노예의 아이로 태어난 수많은 생명이 세상에 나와 처음 수행한 노동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챌 수 없었다.

“현재 우리의 건강은 이름 없는 조상들의 피와 고통에 너무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의학은 18~19세기에 광폭으로 발전했다. 번성하는 제국주의의 관료체계 덕에 전 세계로 파견된 의사들은 시시각각 닥치는 의학적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로 변모했다. 넘치는 열정으로 유행병을 관찰하고, 감염자와 사망자 수를 세고, 주변 환경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던 그들은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다. 사례연구와 통계분석에 근거해 질병을 파악하고 예고하는 역학疫學 역시 이 시기에 탄생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공중보건의 시대가 첫발을 뗀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 시기 의사들이 대규모 임상을 진행하고, 예후를 관찰한 대상은 누구였을까? 당대 의학 혁명을 이끈 학자나 이론이 의학사의 중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것과 달리, 사례연구 현장에 관한 이야기는 말끔히 사라졌다. 이 책 《제국주의와 전염병(원제: Maladies of Empire》은 바로 그 현당, 의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기록이나 기억에서 삭제되어 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어렵사리 발굴해낸 역작이다. 당대 기준과 권력의 그늘에서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해 기존 역사 기록의 빈자리를 채워 넣고 있는 짐 다운스는 이 책에서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흑인과 혼혈인, 노예와 식민지 피지배인, 죄수와 군인들이 전염병 연구 및 역할 발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현미경을 들이대듯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예속된 사람들의 강요된 희생과 가슴 아픈 삶이 근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찬찬히 파고드는 이 책은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현실의 속살, 잘 포장된 외피 아래 우리 삶이 놓인 진짜 자리를 새로운 눈길로 들여다보게 한다.

고의로 누락시키고, 모호한 용어로 얼버무린 역학의 목소리들

책은 1756년 영국 군인들이 수용인원 초과 상태인 인도의 감옥에서 무더기로 죽어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극도의 갈증과 호흡곤란을 겪던 수감자 146명 중 살아서 석방된 사람은 23명에 불과했다. 훗날 ‘캘거타의 블랙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통해 의사들은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의 위험성을 섬뜩하게 인식했다. ‘신선한 공기’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의사들이 주목한 사례가 저 유명한 노예선 브룩스 호에서 토머스 트로터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였다. 당시 해군 군의관으로서 노예선에 배치된 트로터는 배 밑바닥에 짐짝처럼 부려진 노예들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에서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다 죽어가는 노예들을 관찰하던 트로터는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이 두 가지라고 판단했다. ‘더러운 공기’와 ‘영양 결핍’. 노예들을 갑판으로 끌어내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고, 인근 섬에서 과일을 구해 먹이자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노예들의 건강을 보호해 ‘하자 없는 상품’으로 운송하라는 임무를 완수해낸 트로터는 이 경험을 살려 괴혈병 전문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정작 트로터는 논문과 저서에서 ‘아프리카 노예선’ 대신 ‘수많은 사례’나 ‘선박’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제국주의와 노예무역의 폭력성을 지워버렸다. 이렇듯 의사들이 자신의 연구에 도움을 준 대상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관행은 크림전쟁과 남북전쟁, 식민지에 산재한 일터에서 숱하게 일어났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1845년 말 서아프리카 해안의 작은 나라 카보베르데의 섬 중 하나인 보아비스타에서 유행병이 발생했다. 창궐하는 병을 두고 섬의 노예와 자유민, 섬을 통치한 포르투갈인, 아프리카에서 이클레어 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섬에 정박했던 영국인들 중 어떤 집단에서 질병이 처음 발생했는지 논란이 일었다. 질병의 책임이 영국에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대영제국은 해군 군의관 제임스 맥윌리엄을 현지에 파견했다. 젊고 유능했던 맥윌리엄은 질병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대부분 유색인종인 섬 주민 100명 이상을 인터뷰했다. 세탁부인 리모아, 마리안, 레오노, 요새 보초병 바르보사와 마노엘…. 그들은 병이 언제 시작되고 누구를 거쳐 어디로 퍼졌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치밀한 조사를 거쳐 맥윌리엄은 이 감염병이 황열병이며, 최초 질병 전파자는 이클레어 호에 승선했던 영국 군인이라고 결론지었다. 맥윌리엄의 보고서에 비중 있게 등장했던 보아비스타 주민들은 대영제국의 저널이나, 신문, 책에서는 핵심 정보 제공자로서의 위치를 잃었다. 어차피 본토의 권력자들에게 식민지 피지배인의 아픔이나 목소리는 스쳐 지나는 잡음에 불과했다.
책은 크림전쟁을 누비며 현대 역학의 기초를 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노예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남북전쟁에서 오히려 인종차별적 분류체계를 강화해 오늘날까지 질병을 인종 단위로 파악하는 악습을 만든 북부 의사들의 모순적인 활동, 19세기 중반 전 세계로 퍼진 콜레라 대유행 등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사회·역사적 변화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흥미롭게 탐색한다.

우리의 의료시스템에 깊이 각인된 제국주의와 노예제의 짙은 그림자

의사들이 사례연구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안다. 하지만 역학과 공중보건이 첫발을 떼는 단계에서 의료계가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전장의 포로들처럼 예속된 사람들의 고통에 얼마나 많이 빚졌는지를 체계적으로 밝혀낸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저자는 말한다. 제국주의와 노예제도는 현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의료시스템의 DNA에도 깊이 각인돼 있다고. 그렇다면 코로나-19 팬데믹의 목격자이자 역학적 증거로 살아가는 우리의 목소리는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냉정한 시선으로 이곳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책 《제국주의와 전염병》을 읽어보라.

**
[추천사] 이어서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유려하게 쓰인 이 책에서 저자는 의학사, 식민주의, 노예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킨다. 현대 역학의 기원이 강제 노동이라는 불평등 현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저자는 의학, 식민주의, 노예제 역사 연구를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인종과 질병의 연관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제니퍼 L 모건Jennifer L. Morgan(뉴욕대 역사학 교수, 《노예제에 관한 생각》 저자)

“의학의 역사와 제국의 역사 간 교차점들에 대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상세히 설명한 책. 상세하면서도 포괄적인 이 책은 역학 발달의 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의사들에게 집중됐던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이 책은 군인, 죄수, 노예를 의학 발달의 핵심에 위치시킴으로써 현재의 역학적 방법들이 전쟁, 노예제, 식민주의에 의해 형성됐다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에리카 차터스Erica Charters(옥스퍼드대 역사학 교수, 《질병, 전쟁 그리고 제국》 저자)

“노예제, 식민주의, 전쟁과 의학 지식의 발달 사이의 연관 관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흥미로운 책.”-오코리 우네케Okori Uneke(윈스턴세일럼 주립대 사회학 교수)

“다양한 분야의 역사학자들, 특히 건강관리 관련 연구를 하는 역사학자들이 읽기에 적합한 책. 의학의 진화 과정에서 가난한 노예와 군인들이 한 역할을 인식함으로써 이 책은 의사들이 칭송받는 것과 달리 통계상 숫자 중 하나로 보통 여겨지던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마이클 데이비슨Michael Davidson(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캠퍼스 교수)

“블랙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역사기록학 기법을 이용한 저자의 정교한 설명은 의사 개인들의 연구에서 그 연구의 토대가 된 시스템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저자는 노예선의 혼잡한 환경, 더러운 전쟁터, 플랜테이션으로 우리를 인도해, 전염병 전파 이론과 치료법을 만들어내고 공중보건 조치를 권고하기 위해 의사들이 사용한 데이터가 이름 없는 군인, 식민지 피지배민, 노예들의 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엘리자베스 브랜더Elizabeth Brander(〈워터마크〉리뷰)


목차


들어가는 말·5

1 혼잡한 공간들: 노예선, 감옥 그리고 신선한 공기·17
2 누락된 사람들: 전염 이론의 몰락과 역학의 부상·57
3 역학의 목소리: 카보베르데의 열병 추적·83
4 기록관리: 대영제국의 역학·113
5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크림전쟁과 인도에서 전염병과 싸운 숨겨진 역학자·141
6 자선에서 편견으로: 미국위생위원회의 모순적인 임무·183
7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 노예제, 남부연합, 역학 연구·219
8 이야기 지도: 흑인부대, 무슬림 순례자, 1865~1866년 콜레라 대유행·263

결론: 역학의 뿌리·303
주석·315
찾아보기·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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