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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배

미쳐버린 배

  • 줄리언 생크턴
  • |
  • 글항아리
  • |
  • 2022-07-11 출간
  • |
  • 472페이지
  • |
  • 145 X 200 mm
  • |
  • ISBN 97911690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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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영웅과 사기꾼, 광인을 만들어낸 1897년의 극지 여행

 

1897년 벨지카호의 남극 원정에는 19명의 선원이 함께했고, 그 배를 이끈 인물은 서른한 살의 사령관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였다. 어려서부터 선박 모형을 갖고 놀며 오로지 바다 위에서의 삶을 꿈꾸었던 제를라슈는 유서 깊은 벨기에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에 입대했고, 이후 네덜란드 원양 선박 등에서 일했으며, 마침내 마음속으로 품었던 원정대를 직접 꾸리기로 결심했다. 선진국들이 식민지 탐색전을 벌이며 바다로 나서던 시절에 “나라고 왜 못 해?” “벨기에라고 왜 못 해?”라는 반문을 품으면서.

 

제를라슈는 과학적 임무를 탐험의 첫째 목표로 삼았지만, 세계지도 하단에 있는 텅 빈 공백을 채우겠다는 낭만적인 꿈도 품었다. 그리하여 3년 넘게 이 탐험을 계획했고, 함께할 사람들을 구했으며(탐험 성공의 3분의 2는 누구와 함께하는가에 달려 있다), 기금을 모았다. 그의 주위에 낙관주의자들은 별로 없었다. 온통 회의주의자들이 둘러싸더니 이 탐사가 과연 성공하겠느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제를라슈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확고한 결단력으로 마침내 투자자들과 정부 지원까지 끌어냈다. 그는 단순히 모험정신만 지녔던 게 아니라, 이 탐사로 벨기에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겠다는 짙은 애국심, 가문의 이름을 빛내겠다는 명예욕까지 품었다. 한편 이런 감정의 무게는 탐사 내내 그를 따라다닐 것이며, 때로는 실패와 수치심으로 그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위험도 있었다. 사실 그는 죽음보다 불명예를 더 두려워하는 인간이었기에 리더로서 결정적인 순간에 선원들의 목숨을 중시하기보다 목표를 먼저 떠올릴 사람이었다.

 

애초에 드 제를라슈가 세운 목표는 위도 75도 부근에 있는 남자극점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남자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면 향후 항해사들이 나침반 판독을 더 정확히 할 수 있을 테고, 따라서 벨지카호의 결정적인 업적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었다.

 

19명의 선원은 오합지졸까진 아니더라도 정예 요원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구성원으로는 제를라슈의 오랜 벗 단코, 아직 대학 졸업을 못 한 23세의 폴란드 출신 지질학자 아르츠토프스키, 27세의 동물학자 라코비차 등이 있었고, 1년 내내 고르고 고른 선원들도 자격 미달이 꽤 있었다. 어쨌든 어렵게 모은 선원들을 태우고 벨지카호는 남미 끝단에 있는 거대한 섬들의 미로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들은 2년여의 탐사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올릴 것이다. 다만 책 내용은 그런 것에만 중점을 두기보다 이들의 탐험 정신, 명예욕, 과도한 승부욕, 괴혈병에 걸려 창백하게 무너져가는 모습, 단조로운 통조림 음식에 미쳐가는 정신 상태 등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몰입감 있는 서사를 전개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범속한 인간들과는 달랐다. 신체 단련을 끊임없이 하고, 남극 빙하에 갇혀서도 살아남을 만큼 임기응변의 능력을 발휘하며 식물, 동물, 지질학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40년은 걸려야 작업이 마무리될 정도로 이들 과학자가 새롭게 발견해 가지고 온 표본의 양은 방대했다.

 

배는 1897년 8월 16일에 출항했다가 2년도 더 지난 1899년 11월 5일 아침에야 돌아온다. 그사이에 선원 한 명은 바다에 빠져 죽고, 다른 한 명은 배에서 몸져누워 죽는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배에서 가장 경험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갑판장 톨레프는 정신이상 증세를 안고 돌아오며, 그는 이후 평생 수용소 같은 농장에 갇혀 지내는 말로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두 사람! 그중 한 명인 쿡은 감옥에 갇히고, 다른 한 명인 아문센은 영웅이 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저자는 추적과 조사, 치밀한 서사능력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2년여에 불과하지만, 돌아올 때 그들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음의 압박을 목격한 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몇몇 선원은 돌아와 온갖 증세에 시달렸다. 피로, 끊이지 않는 두통, 신경성 문제, 불면증, 심장 이상 증세, 숨가쁨, 현기증……

 

남극 탐사 이후의 삶을 추적하다

 

이 책은 벨지카호에서 돌아온 후 선원 17명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를 끝까지 추적한다. 일행 중 향후 가장 영웅적 반열에 오르는 이는 로알 아문센이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원정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벨지카호 원정은 그에게 극지 탐험에 대한 특별 훈련이었고, 그리하여 이번에는 남자극점이 아닌 북자극점을 향해 1903년 6월 동료 6명과 함께 출발했다. (하지만 위대한 탐험가 아문센도 훗날 변한다. 젊은 모험가의 모습은 사라지고 노년이 되어서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편집증적이 되어갔다.)

 

반면 능력은 많으나 허풍 기질이 심했던 쿡도 새로운 여정을 꾸렸는데 명예를 얻기는커녕 지저분한 사건에 끊임없이 연루된다. 모두 그의 야망 때문에 생긴 일이고, 그는 내리막길이 아닌 추락의 길을 걷는다. 가령 인류학적 보고서와 푸에고 원시인들의 3만 단어짜리 야칸어-영어 사전을 펴내는 과정에서 그는 실질적인 저자의 이름을 누락시킴으로써 사기꾼으로 기록된다. 게다가 이후 그가 정복했다던 북극이나 데날리산 모두 증거 제시 없이 불확실한 채로 남아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벨지카호 사람들이 남극의 미스터리를 밝히라는 부름에 응한 것처럼, 저자는 오늘날의 과학자와 탐험가들이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드 제를라슈의 대담함, 아문센의 불굴의 용기, 쿡의 상황 대처 능력을 갖추길 바라면서. 벨지카호 원정대가 뭔가를 입증했다면, 우리 역시 운명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펭귄, 물범 뼈, 심해어 그리고 한 세기 이상 지속될 평화

 

두 명이 죽고 목표였던 남자극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해도 벨지카호는 오늘날 미국항공우주국 대원들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대단한 여행을 해냈다. 우선 이들이 남긴 수집품을 보자. 현재 왕립 벨기에 자연과학연구소에는 벨지카호의 기록물이 다수 보관돼 있다. 그중에서 안락사시켜 가져온 황제펭귄 표본이 두드러지는데, 눈은 텅 비어 있고 털은 윤기를 잃었지만, 반듯한 자세로 선 이 새는 보는 이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옆엔 젠투펭귄, 아델리펭귄도 있고, 에탄올에 담궈진 물범 뼈와 심해어도 있다. 수백 종의 식물과 동물(이끼, 지의류, 물고기, 새, 포유류, 곤충, 원양 유기체)에서 수천 개의 표본이 나왔는데, 이는 과학계에 대부분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극권 남쪽에서 최초로 1년 치 기상 및 해양학 자료를 수집해 얼어붙은 대륙에 대한 우리 이해의 기반을 다져주었다.

 

벨지카호의 유산은 과학적인 수확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 한 일은 현대의 국제적 원정 가운데 최초라 일컬을 만하다. 서구 열강들이 세계를 나눠 가지려고 호전적 애국주의를 노골화하던 시대에 드 제를라슈는 현재까지 남극 대륙에서 지속되는 세계 협력의 표준을 수립했다. 그가 오늘날 자신의 이름을 딴 해협에 대해 벨기에의 영유권 주장을 거부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과학은 정치와 국경을 뛰어넘는다는 신념에 따라 드 제를라슈는 한 세기 이상 계속될 평화를 위한 발판을 남극에 마련한 것이다. 드 제를라슈와 1957~1958년 남극 임무를 수행한 그의 아들 가스통 덕분에, 벨기에는 1959년 남극 대륙에 어떤 군사적 활동도 금지하는 남극 조약에 서명했다. 그리고 1991년에는 후속 협약으로 남극의 동물과 자원을 어떠한 형태의 착취로부터도 보호한다는 마드리드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남극의 이러한 선례는 다시금 국제우주정거장과 같은 위대한 과학적 노력에 적용되어, 경쟁 국가의 우주 비행사끼리 영토 다툼 없이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벨지카호가 위도상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나 남자극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원정대는 해도에 새로운 땅을 그려넣었고, 남극권에서 과학적 업적을 세웠으며, 남극의 겨울에서 살아 돌아왔다. 이 모든 일을 역사상 최초로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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