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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징비록

  • 류성룡 ,김시덕(역해)
  • |
  • 아카넷
  • |
  • 2013-10-23 출간
  • |
  • 788페이지
  • |
  • 160 X 222 X 40 mm /1181g
  • |
  • ISBN 978895733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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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징비록』 ㅡ 전근대 한·중·일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읽힌 우리의 고전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5번째로 나온, 『교감·해설 징비록』은 류성룡이라는 조선의 고위 관료가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의 전체 틀을 제시하고 이를 자신의 관점에서 솔직하게 기록했다는 데에 가장 중대한 의의가 있다. 류성룡은 전쟁의 원인과 전체 진행 과정은 물론, 본인과 여러 개인의 전쟁 체험까지 생생하게 담아낸다. 『징비록』이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이 맞은 존망의 위기를 겪어낸 한 인간의 회고록이자 역사서로서 위상을 차지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관계있는 여러 나라에서 집필된 문헌 가운데 전쟁의 전체상을 가장 포괄적이면서 치밀한 구조와 생생한 문장으로 전하며 전근대 동아시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국익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적인 정치인이자 균형감각을 지닌 외교관, 난중에서의 전략과 전술을 보여준 지략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 이순신을 발탁하고 또 임진왜란의 수습을 진두지휘하던 중에도 이미 누르하치의 여진인이 장차 위협이 되리라 예상하여 대비책을 논의한 선견지명의 지도자,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과 시대를 품은 경세가로서 류성룡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해자 김시덕은 초본과 간본 등 『징비록』의 여러 판본은 물론 임진왜란과 관련해 류성룡이 여러 문헌에 남긴 증언, 17세기 후기 일본에서 간행되어 일본과 중국에서 널린 읽힌 일본판 징비록인 『조선징비록』 등까지 검토·교감(校勘)하고 깊이 있는 해설을 붙여 완결판 『징비록』을 만들어냈다.

420여 년 전의 기록을 오늘 다시 읽는 까닭은? ㅡ 오래된 미래를 위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

그러자 평양성의 관리와 백성들은 난리를 일으켜 칼을 들고 길을 가로막아 제멋대로 공격하여 종묘사직의 위패가 땅에 떨어지고, 따라가는 재신들에게 “너희는 평소에 나라에서 주는 녹봉을 도적질해 먹다가 이제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는 것이 이와 같은가!”라고 심하게 꾸짖었다. (중략) 부녀자와 아이들이 모두 격노하여 서로 “이미 성을 버리기로 하였으면서 왜 우리를 성안에 들여 넣어서 적의 손에 희생당하게 하는가!” 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256쪽)

1592년 4월 13일에 난리가 일어나고 17일 만에 한양을 버린 선조와 조정이 평양성마저 버리고 다시 피난길에 오르자, 도망치기에 급급한 무능한 조정에 대해 백성들의 원망과 질책이 쏟아지는 장면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왕은 세자와 승지를 통해 평양성을 굳게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흩어진 성안 백성들을 다시 평양성으로 불러들인 터였다. 역해자는 “유럽이라면 민중 봉기가 일어나서 임금의 목이 달아났을 법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묘사한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서울 사수를 약속한 정부가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버리면서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해 버린다. 3개월이 지나 9·28 서울 수복이 된 이후, 떠나지 못하고 인공 치하에 남게 된 시민들은 이번에는 부역자 재판에 시달리게 된다.

35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상황 전개가 묘하게 닮아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것도 불운하고 불행한 방향으로. 인류 최대의 발명품인 문자로 기록을 남겨 역사를 만드는 이유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뒷사람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에스파냐 출신의 미국 철학자 산타야나의 경구처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지난 일을 반성하여 다시는 국란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징비록』의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은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게 된다.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박은식이 『한국통사(韓國痛史)』(규장각 총서 제2권)를 기록한 뜻을 새김질하지 못한 그 후손은 35년 후에 분단이라는 쓰라린 통사를 맞게 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아시아 최다 보유국(11건)인 대한민국은 지금 ‘역사 교과서’와 ‘정상회담 대화록’ 등 기록과 역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라는 역사 거울로서 『징비록』이 던지는 메시지가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징비록』이 동아시아의 베스트셀러가 된 까닭은? ㅡ 국제전쟁의 전체 틀과 자신의 솔직한 관점

“이러한 의미에서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대한 개설서라기보다는 처칠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 『제2차 세계대전』(1945)과 같은 회고록에 가깝다. 『징비록』이라는 회고록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견고한 구조와 설득력 있는 문장, 그리고 인간의 냄새로써 동아시아 세계의 독자들을 끌어들였다.” (14쪽)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임진장초』, 『선조실록』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고전으로 꼽힌다. ‘누구나 다 읽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읽지 않으면서도 시침 뚝 떼고는 다 읽은 척하는 책’이 고전이라는 말이 있다. 『징비록』은 더더욱 그러한 듯하다.

특히 『난중일기』는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그 저자는 영화 『성웅 이순신』(1962, 1971)과 『난중일기』(1977), 소설 『칼의 노래』(초판 2001),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 등으로 알려져 한국인들에게는 이미 ‘최고다 이순신’으로 자리 잡은 상황임을 고려하면, 창작 오페라 《아 징비록》이 있다손 해도, 『징비록』과 류성룡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면 17세기 『징비록』이 전쟁의 무대였던 조선의 인민들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사람들에게도 강렬하게 다가들었던 요소는 무엇일까? 『징비록』의 교감·해설자 김시덕은, “류성룡은 이 책에서 자신의 훈공을 강조하기도 하고, 자신을 의지하고 백성들이 모여들었다며 자기의 행적을 미화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적인 측면까지 포함해서 류성룡이라는 조선의 고위관료가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의 전체 틀을 제시하고 이를 자신의 관점에서 솔직하게 적었다는 데에 『징비록』이 지니는 가장 중대한 의의가 있다”라고 말한다.

비밀 대외비 외교서 『징비록』 ㅡ 일본에 유출되어 ‘그들’의 문화에 미친 파급력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김성일의 『해사록』, 류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등의 책에는 두 나라(조선과 일본) 사이의 비밀을 기록한 것이 많은데, 지금 모두 오사카에서 출판되었으니, 이것은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신유한, 『해유록』 (15쪽)

“이런 의미에서 17세기 조선의 역관들이 『징비록』을 일본으로 유출한 것은 줄리언 어산지나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를 대량으로 공개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사실에 비유할 수 있겠다.” (15쪽)

위 인용은 1719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이 『해유록』에서 조선의 역관들이 국가의 기밀을 담은 『징비록』을 일본에 넘겨서 그곳에서 출판까지 되었다고 한탄하는 대목이다.

역해자는 “『징비록』이라는 책 이름이, 쓰시마 번주의 문고에 소장된 서적을 1683년경에 재물조사해서 작성한 『덴나 삼년 목록』에 보인다. 따라서 늦어도 이때까지는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라 하고 있다. (20쪽)

『징비록』은 조선뿐 아니라 1695년 일본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제목으로 교토의 출판업자 야마토야 이베에에 의해 간행되어 일본과 중국에서 널리 읽혔다. 김시덕은 『징비록』이 조·일 사회 일반에까지 깊이 남긴 방증의 하나로, ‘징비록’이라는 제목을 딴 전혀 다른 장르의 문헌들이 양국에서 등장한 점을 들고 있다. 조선에서는 『징비록』이라는 예언서가 나왔고, 일본에서는 에도 지역의 유곽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룬 풍속소설 『북리징비록』(1768)과 1657년의 메이레키 대화재를 다룬 가메오카 소잔의 『메이레키 징비록』(1787)이 나왔다. 이들은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의 원래 내용과는 무관하게 ‘징비록’이라는 제목만을 빌려 온 것이다. 이런 문헌들은 『징비록』이라는 문헌의 존재 및 그 내용이 조·일 양국에서 넓은 계층에까지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다. (15~17쪽)

임진왜란을 테마로 조선 책이 적지 않게 일본으로 유출되었지만, 거의 전적으로 『징비록』만이 다양한 학파의 학자는 물론 정치인, 소설가 등에게 읽히며 근세 일본의 문화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으며,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는 임진년 7년 전쟁의 전체상을 가장 거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징비록』이 전쟁 당시 조선과 명의 비밀한 동향까지 상세히 서술한 일종의 비밀 대외비 외교서라는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에 이어 중국에까지 흘러들어 간 『징비록』 ㅡ 전근대 한·중·일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상징

“이 책(『징비록』)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 가이바라 엣켄 서문, 『조선징비록』 (84쪽)

17세기 후기 일본의 저명한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이 후쿠오카 번을 지배한 구로다 집안의 임진왜란 당시 행적을 기록하면서 『징비록』을 이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학자도 높이 평가하듯이, 『징비록』에서는 류성룡이라는 인간의 감정이 세밀하고도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1693년에 일본 의사 마쓰시타 겐린이 중국과 한국의 문헌에 보이는 일본 관련 기술을 널리 모아 간행한 『이칭일본전』의 하권에 한국 문헌 14종과 함께 『징비록』의 초록을 수록하면서, 『징비록』은 일본의 독서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위 가이바라 엣켄의 서문과 조선국의 행정구역표, 조선 지도를 붙인 일본판 『조선징비록』은 19세기 말 일본에 체류한 중국 학자 양수경(양서우징)을 통해 청나라에 소개되어 임진왜란과 류성룡에 대한 중국인의 관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덴나 삼년목록』에 따르면, 류성룡의 『징비록』과 『서애집』을 비롯해서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 김성일의 『해사록』 등 임진왜란 관련 정보를 담은 조선 서적이 일본에 다수 유출 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 가운데 근세 일본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다시 일본판 『조선징비록』이라는 형태로 중국으로까지 건너가 읽힌 책은 『징비록』뿐이다. (이상 20∼24쪽)

『징비록』의 자기반성 사관 ㅡ 류성룡이 ‘용비어천가’가 아닌 ‘징비’의 기록을 남긴 이유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전의 일도 가끔 기록한 것은 임진왜란이 그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시경』에 “나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이다.” -류성룡 서문, 『징비록』 (77쪽)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한때의 난리로 바라보지 않고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자 한 자신의 집필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많은 문헌에서 일본을 ‘왜’ 또는 ‘적’이라고만 부르는 데 반해,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일본을 지칭할 때 ‘적’이라는 호칭과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동시에 사용한다. 김시덕은, “이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단순한 도적 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전쟁을 조선이라는 국가와 일본이라는 국가 간의 정식 전쟁으로도 파악하고자 한 류성룡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분석한다.

그리고 류성룡은 『징비록』의 첫머리에서 『해동제국기』라는 외교서를 작성한 신숙주가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음에도 조선이 일본의 정세 변화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 것이 이 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한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미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전쟁을 막기 위해 조선 측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음에도 이를 게을리 한 것에 대해서는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성찰이었다.” (30~32쪽)

류성룡의 ‘불멸의 이순신’ 발탁과 천거 ㅡ 『징비록』의 이순신 사관, 일본에도 영향을 끼치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하여 그가 정읍현감에서 여러 단계를 뛰어넘어 수군절도사로 승차(승진)하니, 어떤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승진을 의심하였다.” (136쪽)

『징비록』에서는 명군의 원조를 중시하면서도 조선의 관군, 의병, 조정이 수행한 역할 역시 명군의 역할 이상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류성룡이 중점을 두려 한 것은 이순신이었다. 명군의 1차 평양성전투(1592년 7월 17일) 패배 기사 다음에 시간순 배치를 거슬러서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7월 7일) 승리 기사가 제시되고, 그 이후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의 일진일퇴가 그려지다가, 책 말미에서 이순신의 체포와 백의종군, 일본군의 퇴각을 막으려는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이순신의 여러 일화를 소개하면서 “여러 장수들은 이순신을 신으로 여겼다”라는 문장으로 『징비록』 본문을 끝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징비록』이 제시하는 임진왜란 7년은 류성룡의 이순신 천거, 이순신 군의 승전, 이순신의 장렬한 전사라는 세 부분을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징비록』의 이순신 사관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영웅이 이순신이었다면, 그를 ‘불멸의 이순신’으로 역사 속에 영구히 새긴 것은 류성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징비록』의 이순신 사관은 일본에서도 받아들여져서, 『조선징비록』이 간행된 10년 뒤인 1705년 8월에 동시 출간 된 『조선태평기』와 『조선군기대전』에서는 이순신을 ‘영웅’이라고 칭하고 그의 활약이 일본 장군들과 동등하거나 더욱 컸던 것으로 그려진다. (32~34쪽)

류성룡은 이후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의 무고에 대해 명 조정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정적(政敵)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파직되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으니,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전사와 류성룡의 파직이라는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류성룡 ㅡ 붓을 든 선비가 아닌 투구와 갑옷을 입은 전쟁 사령관

“또 조총을 가르치려고 하였지만 화약이 없었다. 그때 군기시 장인인 대풍손이 적의 진영에 들어가 화약을 많이 만들어서 적에게 주었다는 죄목으로 강화에 가두어 두고 장차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나는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하고 그 대신 [대풍손에게] 염초를 제조하라고 하였다. 그 염초를 날마다 각 부대에 나누어 주어 밤낮없이 훈련하게 하고는 잘하고 못하는 자들에게 상벌을 주었다. 한 달이 지나자 날아가는 새를 맞출 수 있게 되었고 (이하 생략)” (639~640쪽)

『교감·해설 징비록』의 앞표지에 실린 갑주(갑옷과 투구)에서 알 수 있듯, 류성룡은 도체찰사(조선 시대에,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군직)로 임무를 수행하며 임진왜란 중에 명군의 전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훈련도감의 설치를 주장하고, 명나라 장군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입수해서 조선의 군사제도를 개혁하는 등 정치가로서뿐 아니라 병학가로서도 업적을 남겼다.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이 없었다면 류성룡의 삶은 어떠했을까? 역해자의 생각처럼, 조선시대에 드물지 않은 도학자이자 정치인의 틀에서 크게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70쪽). 건국 후 200년 만에 맞은 국가 최대의 위기에 류성룡은 시대가 요구하는 자기책임을 다하려 한 인물이다.

나라와 백성을 품은 경세가로서 류성룡 ㅡ 일본의 가부키에 등장하다

“조선 팔도의 7, 8할은 쓸쓸한 황무지로 바뀌어 농사짓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숲 속을 숨어 헤매며 굶어 죽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중략) 조선의 승상(丞相) 류성룡은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솔잎과 나무껍질을 가루로 만들고 쌀가루를 섞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주었다.”
- 근세 일본의 대하 역사소설 『에혼 다이코기』 (본문 418~419쪽)

선조는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6월 11일(1592년)에 평양을 탈출하여 여차하면 명나라에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류성룡은 이에 극력으로 반대하며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각종 제안을 올린다. 그 가운데에는, 전쟁에 익숙한 평안도 강변 지역의 병사들을 적극 활용하되 그들은 여러 번 징발되었던 만큼 필시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있을 터이니 그들을 구휼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과, 지금 국가의 창고를 약탈하는 무리들도 원래부터 난민(亂民)이 아니라 먹을 게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눈에 띈다. 백성을 생각하는 경세가로서 류성룡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징비록』이 널리 읽히면서, 근세 일본에서는 『징비록』의 저자인 류성룡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야마시로국 짐승무덤〉(1763년 초연)처럼 류성룡이 등장하는 연극(가부키)이 있는가 하면, 1801년에 간행된 대하 역사소설 『에혼 다이코기』 제7편에는 위 인용에 보이는 류성룡의 행적과 삽화가 실려 있 있다. (418~419쪽)

“류성룡의 삶을 평가하자면 현실주의적인 정치인이자 균형감각을 지닌 외교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베스트셀러 『징비록』의 저자로서의 삶이라고 하겠다. 류성룡은 대명(對明) 관계에서 국익을 우선시하다가 명나라에서 조선의 간신으로 치부될 정도였으니, 비상한 시국에 놓인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이로써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시점에 토사구팽 되었으나, 『징비록』이라는 위대한 변론서를 집필하여 조선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전근대 동아시아 사람들의 인식을 규정하였다.” (70쪽)

“이 역해본을 내면서 역해자의 연구 인생에서 첫 사이클이 완결되었음을 느낀다”

“역해자가 근세 일본의 대하 역사소설인 『에혼 다이코기』에서 『징비록』이라는 책 이름을 확인하고 놀랐던 것은 2001년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징비록』의 역해본을 내면서 역해자의 연구 인생에서 첫 사이클이 완결되었음을 느낀다.”

김시덕은, 시쳇말로 단언컨대, 임진왜란 연구와 관련해 학계와 출판계서 가장 크게 주목받는 소장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ㅡ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2010)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제4회)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하였다.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2011)과 『일본과 이국의 전쟁과 문학』(2012)이 제2777·2839회 일본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전작 『그들이 본 임진왜란: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와 전쟁의 기억』에서 ‘우리가 몰랐던 근세 일본의 임진왜란 담론’을 밝힌 김시덕은, 이번 교감·해설 『징비록』에서는 국제전으로서 임진왜란과 『징비록』의 보편성(35쪽)을 짚어내어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풀어내고 있다.


목차


해제 - 『징비록』과 동아시아
1 『징비록』, 동아시아의 베스트셀러
2 『징비록』의 성립과 일본·중국으로의 전파
3 『징비록』의 임진왜란관 - 자기반성 사관과 이순신 사관, 또는 조선 중심 사관
4 국제전으로서의 임진왜란과 『징비록』의 보편성

시대를 품은 정치가, 류성룡
1 류성룡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2 임진왜란 이전의 삶과 세계관
3 비상한 시국에 빛을 발한 국정 운영 능력
4 임진왜란 이후의 류성룡과 『징비록』
5 류성룡, 시대를 품은 경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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