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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 김용헌
  • |
  • 프로네시스
  • |
  • 2010-04-09 출간
  • |
  • 307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01106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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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성균관 유생들, 가두시위를 벌이다

인조 13년(1625) 남인 계열 성균관 유생 50여 명이 성균관을 박차고 나왔다. 이들은 건복巾服 차림을 한 채 “(서인 계열) 성균관 유생들에게 쫓겨났다”고 외치며 대궐 앞을 행진하는 등 등교 거부 및 거리 시위를 벌였다. 효종 1년(1650)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효종의 즉위년을 경축하기 위한 과거를 앞두고 이번에는 서인 계열 성균관 유생 100여 명이 등교 거부를 선언한 것이다. 조정 신료들의 꾸짖음과 회유에도 돌아오지 않던 유생들은 결국 효종의 사과를 받아내고서야 성균관으로 복귀했다. 남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이 발단이 된 이 소요는 숙종 7년(1681) 이들의 종사가 결정될 때까지 56년 동안 계속되었다(6장 이이 · 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220~230쪽).
이들 성균관 유생들은 왜 가두시위에 나선 것일까? 성균관 유생 시위 사건은 우율(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서인 세력은 두 성현을 문묘에 종사해 사림의 종장으로 추대해 정치적 권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서인과 권력 다툼을 벌이던 남인 세력은 이이가 젊은 시절 불문에 든 적이 있음을 폭로하며 이단 논쟁에 불을 붙이는 등, 서인 세력에 의한 두 성현의 문묘 종사를 극구 반대했다. 이렇듯 서인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왕의 이해와 맞물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는 종사와 출향(숙종 15년), 복향(숙종 20년)을 거치며 극심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비화한 것이다.

문묘 종사, 조선사 최대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다

문묘는 문선왕(文宣王, 당나라 현종이 내린 공자의 시호)의 사당이라는 뜻으로 유학의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선비만이 당당히 그 이름 석 자를 공자의 옆자리에 새기는 종사의 자격을 얻었다. 불교를 근간으로 한 고려 때만 해도 문묘 종사는 유학이라는 특정 학문 영역의 문제였지만 정도전 이래 유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권력과 지식의 결합 양상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퇴계, 율곡, 남명 학파가 그들의 스승을 문묘에 들여 공자와 주자의 계보를 잇고자 다투었으며 그들과 연계된 정치 세력들이 힘을 보탰다. 현실적인 권력에 권위라는 날개를 달고자 한 쟁투가 문묘를 조선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장소로 기록하게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문묘에 종사되거나 종사 논쟁에 휩싸였던 ‘정도전, 정몽주, 조광조, 이황, 조식, 이이’ 등 6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의 역사를 추적한다. 이들 대표적 유학자들의 첨예한 논점을 모두 담고 있는 종사 논쟁의 재구성은 ‘학문과 권력에 관한 계보학적 탐색’이라는 조선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인사청문회보다 살벌한 문묘 종사 논쟁

공자로부터 2500년을 이어온 유학의 성전으로, 공자와 4성, 공자 문하의 10철 그리고 수많은 유학의 스승을 모시고 있는 곳이 문묘다. 명륜동에 위치한 성균관과 234개의 지방 향교에 이 문묘가 있다. 현재 문묘에는 공자를 포함한 39명의 성현이 모셔져 있는데, 18명의 우리나라 성현도 포함되어 있다.(부록 2 문묘와 동방 18현, 300쪽) 신라 성덕왕 16년(717)에 문묘가 설치된 이래로 고려 때 종사된 최치원?설총?안향을 제외한 15명이 조선시대에 종사되었다.
조선시대 문묘에 종사된 15명의 면면과 종사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당시의 집권 세력이 누구인지, 정치적 역학관계는 어떠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는 학문적 배경이 같은 사람들끼리 정치 일선에서도 파당을 형성하고 그들의 스승을 문묘에 모셔 현실 권력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한 조선시대 권력 메커니즘의 한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점잖은 선비들이 정치적 라이벌 관계의 파당에서 문묘 종사 대상자가 거론되면 그에 대해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테면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인 줄 알면서도 섬겼다는 이유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의심 받았고(2장, 정몽주, 간신에서 조선 성리학의 종주로, 69쪽)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의 처신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이 낳은 대학자도 예외는 아니었다(4장, 오현,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완성하다, 144~153쪽). 이황은 소년 시절 기생과 행적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5장, 조식, 이황의 마지막 라이벌, 180~181쪽) 이이는 한때 불가에 몸담았던 전력 때문에 학문의 순정성을 의심받았다(6장 이이 · 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자격 시비에 휘말린 인물들이 살아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도 스스로 문묘에 오르기를 거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림의 시대, 지식권력의 탄생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꿈꾼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림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한 중종 시대에는 왕위 찬탈과 반정으로 얼룩진 조선 초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됐다. 이들은 개국공신과 반정세력으로 이루어진 훈구파에 맞서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사림파의 도학적 정통성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종사 추진은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정몽주와 김굉필을 동시에 종사하고자 한 그들의 결정은 우리나라의 도통이 이제현-이색-권근 등의 관학파 학자들로 이어진다는 조선 초의 주장과 명백히 구분되는 도통(도학의 계보)론으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통론을 제시했다.(2장, 정몽주, 간신에서 조선 성리학의 종주로)
이를 통해 조선 초에만 해도 간신으로 규정됐던 정몽주가 고려왕실의 마지막 충신으로 또 유학의 종장으로 추대된다. 김굉필의 문묘 종사는 훈구파의 격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후 오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통해 사림파의 학문인 주자학을 조선 유학의 적통으로 삼는 계보를 완성함과 동시에 정치적 권위를 확보한다. (4장, 오현,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완성하다, 129~143쪽).
이처럼 조선시대 문묘 종사의 과정은 사림파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한다. 네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단단해진 내부 결집으로 훈구파를 제압하고 지속적인 문묘 종사를 통해 도통을 확립한 사림파는 청의 등장과 함께 조선을 ‘소중화’로 규정하고 독자적인 주자학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논쟁은 지난했고 때로는 지나친 정쟁으로 국력을 낭비하기도 했지만 이 논쟁들을 통해 조선 성리학은 단단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6장 이이 · 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237~244쪽)

지식과 권력은 한 몸이다

문묘 종사는 늘 현실의 권력싸움의 대리전 구실을 했다. 오현의 문묘 종사는 훈구파에 대한 사림파의 최종 승리를 보여주는 과정이었으며, 조식의 문묘 종사 실패는 대북파와 남명학파의 몰락을 예견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가장 극적인 사건은 우율(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였다. 남인과 서인의 권력 다툼 속에서 종사와 출향(숙종 15년), 복향(숙종 20년)을 거치는 동안 종사의 의미는 퇴색되고 심지어 남인 계열과 서인 계열로 갈라진 성균관 유생들이 번갈아 가두시위를 벌이고 등교를 거부하다 효종의 사과를 받고서야 복교하는 일까지 생겨났다.(6장 이이 · 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220~230쪽)
문묘 종사의 최종 승인권을 쥔 왕과 집권 세력 간의 대립 또한 만만치 않았다. 중종, 광해군, 인조, 효종 등이 이 권한으로 정치세력간의 균형과 타협, 자신에 대한 지지 등을 유도했다. 중종은 훈구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조선 유학의 종장으로 승인함으로써 사림파의 성장을 견인했으며 인조와 효종, 현종은 날로 강해지는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정통성 논란을 잠재우고 사림 전체의 지지를 받기 위해 오현의 문묘 종사를 승인해 40여 년에 걸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뿐만 아니라 도학자, 즉 성리학자의 계보가 확립되는 과정은 문묘 종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지식권력이 제도적으로 행사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이론 자체만으로 보자면 정도전의 주자학이나 송시열의 주자학은 크게 다르지 않다’(서문, 9쪽). 하지만 그 이론이 놓이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정도전에 의해서는 혁명의 무기로 이용되기도 하고, 서인 노론 계열에게 권력이 독점된 이후에는 노론 출신의 인물들만을 문묘에 종사하는 식으로 기존 체제를 수호 · 강화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관통했던 성리학의 학문 경향 또한 ‘육왕심리학’이나 ‘양명학’ 등 주자 이후 중국의 다른 유학 경향을 배척하고 오로지 주자학만을 정통으로 인정해 학문의 교조화를 재촉했다. ‘권력과 지식’은 ‘한 몸(savoir-pouvoir)’이라는 푸코의 권력과 지식체계에 대한 고찰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조선 선비들, 공자의 사당에 오르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는 조선시대 가장 뜨거운 논쟁의 진앙지였다. 역적 정몽주가 충신으로 거듭나 주자학의 종주로 문묘에 종사되고, 퇴계, 율곡, 남명 학파가 그들의 스승을 문묘에 들여 공자와 주자의 계보를 잇고자 다투었다. 대학자의 고고한 인품이나 학문적 업적은 문묘 종사를 둘러싼 자격 시비에 상처입기 일쑤였다. 이황은 소년 시절의 행적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이이는 한때 불가에 몸담았던 전력 때문에 학문의 순정성을 의심받았다. 길게는 반세기, 세 명의 왕에 걸친 논쟁도 불사한 적통 논쟁은 늘 파당 간 정쟁의 정점에 있었다.
주자학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 프로젝트에서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이르기까지 혁명의 무기이기도 했고 권력의 담론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룬 정도전, 정몽주, 조광조, 이황, 조식, 이이 등 6명의 인물들은 문묘에 종사되거나 종사 논쟁에 휩싸였던 유학자들이다. 문묘 종사 논쟁은 이들 대표적인 유학자들에 대한 첨예한 논점을 모두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권력에 관한 계보학적 탐색의 좋은 사례인 것이다.


목차


1장 정도전, 맹자의 혁명론을 읽다
조선 건국을 기획하다 | 이성계파와 정몽주파의 대립 | 정도전, 혁명을 꿈꾸다 | 맹자의 역성혁명론 | 혁명론과 주자학의 만남 | 정도전의 불교?도교 비판 | 불교적 사유에서 주자학적 사유로

2장 정몽주, 간신에서 조선 성리학의 종주로
간신 정몽주 | 『충신 정몽주』의 부활 | 정몽주 문묘 종사 논쟁 | 사림파의 김굉필 문묘 종사론 | 정몽주를 위한 변명 | 도학의 사표가 바뀌다

3장 조광조, 조선 선비의 영원한 이상
기묘사화,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지만 |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 훈구파의 조광조 제거 음모 |언관 조광조, 조정을 발칵 뒤집다 | 중종 시대의 과거청산 | 도덕 사회의 실현 | 성인 군주를 꿈꾸다 | 패도에 대한 경계 | 선비가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 | 끝내 좌초한 조광조의 도학적 이상주의

4장 오현,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완성하다
도학의 계보 | 오현의 문묘 종사 운동 | 왜 오현인가? | 이언적을 둘러싼 선조와 사림의 대결 | 광해군과 사림의 정치적 타협 | 최고의 도학자라는 평가 | 도학이 위기에 빠진 시대 | 이황의 이단 비판

5장 조식, 이황의 마지막 라이벌
남명학파의 불만이 폭발하다 | 조식의 제자 정인홍, 이황을 비판하다 |정인홍의 차자가 몰고 온 파장 | 조식의 문묘 종사 운동 | ‘발운산과 당귀’, 이황과 조식의 신경전 | 조식의 「을묘사직소」|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지리산처럼 | 남명학파의 몰락

6장 이이 · 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인조반정과 이이의 문묘 종사 운동 | 성균관 유생들의 등교 거부와 거리 시위 | 효종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사과하다 | 상복 문제를 둘러싼 예송 | 문묘제와 조선 중화주의

보론 조선 중기 철학 논쟁의 본질
경인년 영남 유생 연명 상소 | 퇴계학파, 율곡학파에 성전을 선포하다 |한국 사상사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 이황?기대승 사단칠정 논쟁의 의미 | 이황과 이이 철학의 차이 | 주리론과 주기론은 유효한가?

미주

부록 1 문묘의 역사와 현황
부록 2 문묘와 동방 18현
부록 3 조선시대 문묘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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