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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의 바이올린

멜라니의 바이올린

  • 허닝
  • |
  • 자유로운상상
  • |
  • 2008-06-30 출간
  • |
  • 368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9080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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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원래 “멜라니의 바이올린”은 작가 허닝이 영화작업을 위해 시나리오를 만든 것 을 그것에 소설적인 가미를 하여 책으로 만든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부터 일본의 패망직전까지 독일의 나치 주의자를 피해 목숨 걸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온 유태인들과 작품의 주인공인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의 긴박하고 절박했던 순간들을 엮은 작품으로,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세계정세와 긴박했던 중국근대사와 함께 독일, 이탈리아, 등과 함께 했던 일본의 유태인 박해의 또 다른 만행을 알리고 있다.
출간 당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화가로써도 유명한 허닝이 소설가로써의 새로운 가능성을 남기기도 했다.
이 소설은 현재 영문판으로도 곧 출간될 예정이며, 한국, 중국, 미국, 프랑스, 와 함께 한국을 주축으로 한 500억 프로젝트로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특히 이 작품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으로 그동안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 이후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도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태인들의 인종 학살이 일본군에 의해 철저하게 자행됐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바가 크다.
마치 소설을 읽다보면 한편의 거대한 스펙타클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과 긴박함과 함께 가슴 깊숙이 전해주는 감동 또한 크다.
미처 우리가 알지 못했던 중국판 “쉰들러 리스트” 올여름 우리 독자들에게는 분명히 “멜라니의 바이올린”은 깊은 감동과 재미를 줄 것을 확신한다.

세계 일류 바이올리니스트인 리랜드 비센돌프는 나치주의자들의 손에 딸을 잃은 뒤 딸의 바이올린 제작품인 ‘멜라니의 바이올린’을 들고 중국으로 건너온다.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지닌 루샤오넨, 루양 남매와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한편 일본인 야스히로는 군인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비센돌프가 중국에 왔다는 사실에 그를 위한 환영파티를 열어 준다. 그러나 자신을 이용하려는 야스히로의 속셈을 파악한 비센돌프는 그를 피하게 되고, 둘의 관계는 악화되어 간다.
그러던 와중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고 그 뒤 유태인에 대한 관리가 엄격해진다. 유태인은 ‘게토’라는 지역에서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며, 야스히로의 허가 도장을 받아야 ‘게토’ 밖 출입이 가능해진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유태인들의 생활은 힘들어지고 일본군의 잔학함은 더해 간다. 그러다 야스히로는 루양과 비센돌프를 각각 감옥에 가두게 되고, 루양의 목숨과 ‘멜라니의 바이올린’을 맞바꾸자는 비센돌프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 본문 중에서

[작가의 말]

제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광적인 종족말살계획이 자행되던 때 상하이는 세계에서 유태인이 무비자로 육지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다.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상하이는 유럽으로부터 도망 온 유태인난민 3만여 명을 수용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의 중심축에 섰으며, 1943년 여름 일본의 점령당국은 상하이의 극빈지역인 홍커우에 유태인난민격리구역을 설립하여 유태인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것은 유태인난민들이 극동지역에서 보낸 가장 험난했던 시간들이었다. 1945년 여름 전쟁에 패배한 일본은 투항하였으며, 격리지역은 마침내 폐쇄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상하이에서 생활했던 유태인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원해 준 곳인 상하이를 잊지 못하고, 상하이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상하이로 돌아와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보이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상하이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유태인 연합회를 만들어 종종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상하이유태인SHANGHAI JEWS’은 이미 중국과 유태인의 생사를 건 우정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대명사가 되었다.
2002년, 블레저(L.A유태신문 편집장)가 허닝에게 보낸 초청장에는 전 세계 유태인을 대표하여 허닝에게 조각전을 주최하고 창작해 달라는 위촉장이 들어 있었고, 이를 상하이시에 선물로 증정함으로써 유태인민족의 중국 국민에 대한 감사의 정을 표한다고 했다.
허닝이 설계한 조각은 서로 꼭 맞잡은 손으로 이것은 당시 중국 국민의 유태인에 대한 구원의 손길을 상징하는 동시에 인류의 이해와 연민, 그리고 우의를 상징하고 있다. 청동을 사용하여 높이 3.5m로 땅 위로 솟아오른 모양의 커다란 손은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준다. 구조물의 기조석 위에는 중문, 영문, 히브리어로 비문과 증정자의 명단을 새겨 놓았다.
상하이시 정부는 이미 이 ‘유태/중국우호 기념조각상’이라 명명된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조각은 앞으로 당시 일본 파시스트가 설립한 유태인난민격리구역의 옛터였던 상하이 홍커우지역의 호산 공원에 세워질 계획이다. 현재, 이 프로젝트의 기부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장편소설 “멜라니의 바이올린”에는 중국 국민과 유태인들이 일본 파시즘에 저항했던 역사적 시기와 공생공사 했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유태/중국우호 기념조각상’을 제작하면서 허닝은 유태민족이 겪었던 종족말살이라는 고난의 역사를 표현한 많은 예술작품 중에서 상하이 유태인이라는 소재가 시종일관 이해할 수 없는 공백상태로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러한 시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 또한 갈수록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기념조각을 만드는 동시에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하는 또 하나의 작품인 영화 시나리오 “상하이 망명”의 창작을 대담하게 착수했다. 중국 국민과 유태인이 손잡고 일본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하는 역사의 시기에 공생 공사했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술하면서 유태인난민들이 극동지역에서 겪은 잊지 못할 경험을 재현해 냈다.
허닝은 또한 로스앤젤레스 유태대학 도서관의 도움을 받아 대량의 역사문헌과 회고록 열람하면서 근 일 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하였고, 많은 유태인 친구들은 그의 시나리오를 읽은 후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2004년, 허닝은 시나리오 줄거리를 바탕으로 소설로 확장했으며, 마침내 “멜라니의 바이올린”이라는 소설이 탄생하였다.
2005년, 허닝은 상하이 홍커우 지역 외사 사무실의 초청을 받아 ‘유태인난민 상하이 기념관’의 개축과 확장방안에 관한 기획 작업에 참여하였다.

[작가노트]

1998년 연말 어느 날 저녁, 나는 로스앤젤레스 〈유태신문〉의 편집장 필 블레저 선생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다음 날 오전 상하이방송국의 한 프로그램 제작팀과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다며, 나에게 그 자리에 참석하여 필요시 통역을 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인터뷰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수천만 명의 유태인이 나치 독일의 대학살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것에 관한 내용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심혈을 기울여 제작된 〈상하이 망명 FLED TO SHANGHAI〉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
인터뷰 당일, 상하이방송국의 인터뷰 담당자가 “역사상 고도의 문화를 자랑하던 도이치민족이 왜 유태민족에게 대학살이라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을까요?”라고 묻던 장면은 내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블레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질문을 받으면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상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과는 정반대인 당신네 중국인들이 거의 4만 명에 가까운 유태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뒤에 앉아 있었던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감동은 내가 글을 통해 이 시기의 역사를 표현할 수 있었던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그 후 200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내가 며칠 후 필 블레저와 만났을 때 필 블레저는 내게 할리우드의 저명한 영화배우인 폴 뉴먼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또 상하이의 홍커우虹口지역 내 일본인이 세웠던 ‘게토’의 옛터에 기념조각상을 세울 계획을 설명하면서 내게 이 조각상의 초안을 설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이 제안을 수락한 동시에 아주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일을 계기로 나는 30~40년대에 상하이에 거주했던 유태인에 관한 서적자료를 열람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나는 이 기회를 빌려 로스앤젤레스 유태대학(THE UNIVERSITY OF JUDAISM) 도서관 관계자였던 하임 고트스하크 씨와 폴 밀러 씨의 전폭적인 지원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난 그때 당시 상하이로 망명했던 유태인난민 중 한 사람을 아버지로 둔 하임 씨의 도움으로 몇 번이고 관련서적을 빌릴 수 있었으며, 폴 밀러 씨는 내가 도서관의 상하이 유태인과 관련된 전체 서적과 자료를 찾는 것을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아마 그 즈음부터 “멜라니 의 바이올린”의 창작에 대한 열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또 중국 IBM 사의 곽유덕 선생과 상하이 홍커우지역 사무실의 책임자였던 진검 선생, 상하이유태연구센터의 주임인 반광 교수, 미국인 친구 빌 콜리아와 그의 부인 메이 콜리아, 독일인 친구 엘리자베스 카스케 등에게 감사를 표한다.
중국역사상 유태인이 가장 먼저 집단 형태로 중국을 자신들의 정착지로 삼은 것은 중국이 봉건사회였던 북송 후기로, 시간적으로는 서기 11세기쯤 된다. 이들은 대략 천여 명에 달했으며, 인도에서 해로를 통해 건너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송황제의 환영을 받은 그들은 수도였던 개봉KAIFENG에 정착하는 것이 허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성까지 하사받았다. 무명천과 염색 제품으로 생업을 삼았던 유태인들은 대단히 성공한 상인들이었다.
유태인이 상하이에 이주한 두 번째 역사는 19세기 중엽 상하이 세파르딕 유태인 무역 단체의 강력한 흥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파르딕’은 시베리아어로 스페인을 지칭한다. 세파르딕 유태인이 가리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생활했던 유태인과 그들의 후예들이다. 상하이로 건너온 세파르딕 유태인 집단은 상당히 부유한 상인과 기업가들이었으며 뛰어난 경영능력에 힘입어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상하이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단체가 되었다.
유태인들이 중국으로 세 번째 대규모 이동을 한 것은 두 번째 이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시간적으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러시아 유태인의 차르러시아 반 유태인 탄압과 볼셰비키혁명이 가져온 내전을 피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북의 하얼빈, 장춘에서 화북의 텐진까지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점차 상하이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이 사람들은 유태인의 중요한 부류로 아시케나지 유태인의 일부이다.
‘아시케나지’는 라인강 및 게르만지역에 거주하던 유태인과 그들의 후예를 일컫는 말이다. 아시케나지 유태인이 창조한 문화는 이디시 유태문화이며, 그들의 언어는 바로 누구 나 다 아는 이디시어이다. 상하이로 온 러시아의 아시케나지 유태인은 바그다드에서 온 세파르딕 유태인에 비해 많이 가난했다. 상하이에서 음식점이나 잡화점과 같은 소형 상점을 운영하던 그들은 점차 상해의 중산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30년대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유럽의 유태인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을 때, 상하이에 있는 두 유태인집단의 수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상하이 경제의 각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이들은 훗날 그들이 직면하게 될 유럽의 유태인난민 구제활동에 강력한 물질적 배경이 되었다.
파시스트의 위협이 두려워서, 또는 자국의 역량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문호를 걸어 잠글 때, 상하이는 유태민족이 무비자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다. 따라서 수천, 수만 명의 유태인난민(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온 유태인들)이 물밀듯이 상하이로 들어오게 되었다.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유태인난민은 막강한 경제력과 문화 활동으로 상하이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접하면서 우리는 그 힘든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강력한 세력으로 우뚝 선 유태인민족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유태인단체가 가져다 준 유태문화 역시 자연스럽게 상하이 사회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역사를 회고할 때, 우리는 중국인과 유태인 간에 많은 유사점이 있으며 그들이 함께 과거와 현재를 겪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전, 블레저 선생은 나에게 최근 유태인이 또다시 상하이로 돌아오고 있으며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유태인식 혼례를 거행했다는 내용이 담긴 간행물의 발췌자료를 주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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