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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지리지 검토서: 요동군, 요서군, 현토군, 낙랑군, 패수

한서지리지 검토서: 요동군, 요서군, 현토군, 낙랑군, 패수

  • 유우찬
  • |
  • 대세
  • |
  • 2019-08-27 출간
  • |
  • 133페이지
  • |
  • 152 X 226 X 13 mm /223g
  • |
  • ISBN 9791187349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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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본문내용일부]
제2절 요동군(遼東郡) 위치찾기

한나라 요동군 치소 양편현은 고구려와 후연의 요동군 치소다.
요양현은 요, 금, 청의 남경, 동경이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지명이다. 그래서 요동군, 양평현, 요양현 세 가지만 검토한다.

1. 요동군(遼東郡):
한서지리지기록: 秦置屬幽州. 戶55,972. 口272,539. 縣18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요동군(遼東郡)(P.1245)
“진나라 때 설치한 것은 지금 요녕 동남계이다. 요하동쪽이라서 이름이 되었고 치소가 양평인데 지금 요녕 요양현 북 70리다. 진나라 때 요동국이다. 후연 때는 고구려 땅이다. 후위에서 수나라까지는 다 고구려 요동성에 속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요동성에서 싸웠는데 그 땅을 요주라고 했다. 후에 폐했다. 명나라가 요동도사를 설치했다.
후위 때의 치소는 지금 하북성 서수현 서쪽 25리에 있다.(秦置. 今遼寧東南境. 在遼河之東. 故名. 治襄平縣. 在今遼寧遼陽縣北七十里. 晉爲遼東國. 後燕時地入高句麗. 後魏至隋俱屬高句麗爲遼東城. 唐太宗征高麗. 克遼東城. 以其地爲遼州. 後廢. 明時治遼東都司. (구俱:다)
後魏置. 故治在今河北西水縣西二十五里)“
※해설
① “지금 요녕 동남계이다. 요하동쪽”
손문의 중화민국 때의 요녕성은 감숙성에서 만들어 산서성 북부로 이동했다가 1927년에 신만주로 이동 조작했으므로 감숙성, 산서성 북쪽, 신만주 3개소가 검토대상이다. 그런데 요하동쪽이라고 했으니 요동군 서쪽에 요하가 있다는 확실한 증명이다. 요하 동쪽이라고 하려면 요하가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는 절대의 조건이 성립된다. 산서성 분하와 청장수가 남북으로 흐르는 大江인데 청장수를 요수로 조작했으나 요동군의 지명들이 없다. 하북성에서는 남북으로 흐르는 대강이 없으니 요동군이 존재할 수 없다. 결국 감숙성과 신만주 두 곳인데 신만주 요녕성은 1927년에 처음 설치되었고 요녕동남계는 현재의 압록강이므로 이 문장은 검토할 필요도 없이 원래위치가 감숙성이다.
②“치소가 양평인데 지금 요녕 요양현 북 70리다.“
요동군의 치소 양평은 고구려 요동성이고 당나라 때 요주이며 명나라가 요동도사(遼東都使)를 설치했는데 요녕성 요양현 북 70리에 있다고 했으므로 감숙성 요양현 북쪽 70리이다.
명나라가 요동군 총사령부인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감숙성 요양에 설치했으므로 명나라는 청해성의 나라이며 하북성 북경에 온 일이 없다.
※요동요서가 북경일대로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의 무대를 감숙성에서 산서∼하북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마드(한반도)의 고씨 혈통이 대륙으로 퍼져서 중국대륙을 5200년 전의 신농부터 고구려까지 무려 4000여 년간이나 지배했으므로 마드(한반도)는 중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성스럽기까지 한 민족이고 위대한 나라이다. 그런데 일제의 군사망령 때 그 성스럽고 위대한 나라의 역사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서쪽의 역사무대를 중국동부로 이동시켜서 그 위대한 역사를 말살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 는 이렇게 위대한민족을 반대로 가장 허약한 민족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이 땅(신만주와 한반도)의 과거역사를 모조리 말살하고 이 땅에는 겨우 2000년 전의 삼국시대부터 역사가 있었는데 중국의 지배를 받은 중국의 지방정부이고 문명문화도 없었으며 허약한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상을 심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인들은 그러한 사대주의와 식민사상에 길들여져서 필자가 “이 땅은 세계의 뿌리언어를 가진 민족이 살았고, 15000년 전의 쌀, 1만년 이상 된 토기, 고인돌, 옥제품, 최고 6000년 된 만주의 피라밋 같은 훌륭한 문명문화를 가진 민족이고, 중국대륙을 4000년이나 지배한 민족”이라는 말을 하면 모두 헛소리라고 부정한다. 강단학자나 재야학자 할 것 없이 한사람도 긍정하고 찬성하는 사람이 없이 이 땅의 것, 내 것, 우리 것은 천하고 별 볼일 없는 것이라는 자기비하사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식민주의 교육을 100년이나 받은 국민들은 하나같이 진짜 식민사상에 찌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큰 나라를 섬기는 민족 즉 중국과 일본이 만든 사대주의와 식민주의가 뼈 속 깊이 파고들어 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사대주의나 식민주의를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수나라가 공격한 고구려 성들은 감숙성 서황하 동쪽의 땅 즉 요동 땅에 있다. 그러므로 원래 요동요서의 경계는 감숙성 서황하인데 중국의 모든 기록은 감숙성과 섬서성 기록을 없애고 요동요서를 동쪽의 산서∼하북성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그런데 일제가 이동된 역사무대를 또 고스란히 신만주와 한반도로 이동시켜 깔아놓은 것이 한국사다. 그러므로 원래의 요녕, 요양, 요주, 요동도사의 위치는 감숙성 동부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좌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토,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의 길로 나오고---”(고구려본기영양왕 23년조)에서 수나라가 진군한 좌군의 진로 중에서 감숙성에 있는 지명들 즉 개마(개모성: 개평동쪽, ), 건안(건안: 안시성남쪽), 남소(남소성: 란주남쪽), 요동(요동성: 해원 북), 현토(고구려현: 감숙성평양지역), 부여(부여성: 감숙 해성지역), 조선(위만조선성: 감숙평량), 옥저(옥저성: 감숙 동부 오충추정), 낙랑(감숙 천수) 등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지명들을 하북성 영정하 남북 땅으로 이동시켜 놓았다.
또 “수나라 장수 내호아는 비사성(卑奢城: 沙卑城)성을 쳐 이기고 평양성으로 향했다”(영양왕23년조)고 하였는데 고구려 사비성(비사성)이 감숙성 해성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수나라 양제의 조서에 “(고구려가)요동의 예맥지경을 잠식하였다---”고 했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략하였다---” 고 하여 요동과 요서가 다 나오는데 예맥과 말갈은 현재의 신만주가 아니라 원래의 구만주 땅에 있는 족속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는 한반도 평양에 있었던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한국과 중국의 어떤 사서에서도 한반도에 평양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평양의 토박이 연혁도 없다.
수나라 때는 요동성이 하북성 북경 북쪽으로서 주로 북경 일대와 현재의 요서가 주된 전쟁터인 것으로 조작되어 있지만 다음의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배경은 당태종이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치는 것이 현재의 요하이동의 신만주가 요동 땅으로서 주된 전쟁터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구당서, 신당서는 고구려를 한반도에 옮겨놓은 조작사서임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나라가 공격한 고구려 땅은 감숙성과, 섬서성이지 하북성, 요서지역이 아니다. 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당나라는 중국 본토에 오지 않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가 고구려 유민들과 대조영의 반란과 뒤이어 발해의 공격으로 당나라는 중국 본토에 온 일이 없다.
③“후위 때의 치소는 지금 하북성 서수현 서쪽 25리.”
요서군 조에서 “후위는 비여를 치소로 했는데 지금 하북성 노룡현 북쪽 30리다”고 하여 하북성으로 역사무대를 이동 조작한 다음에 요동을 다시 신만주로 이동조작하니 북경 북쪽은 요서군이 된 것이다.
후위 때의 요동군(북경∼요동반도) 치소가 요서군 땅인 하북성 중부 이수(易水)남부 서수현이라고 했으므로 북경북쪽의 요동을 북경남쪽의 요서군 서수현에서 통치한 것이니 거리나 경계상으로 엉터리다. 또 중국은 방위상으로 동서를 구분하지만 요동요서는 처음에는 동쪽과 서쪽을 구분하다 동쪽인 산서-하북으로 역사무대를 옮긴 후부터는 영정하 북쪽은 요동, 남쪽은 요서로 기록하는 억지필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현재의 요하를 요수로 확정한 후에는 다시 동쪽과 서쪽으로 표기한다. 그러므로 고증 없이 중국의 기록대로만 하면 고구려 이후 청나라까지 모두 요동의 땅인 현재의 신만주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신만주와 한반도의 역사가 되어 한국인들이 속아 온 것이다.

제3절 요양현(遼陽縣)위치찾기

1). 요양(遼陽)의 총론:
①漢나라 遼東郡소속
②後燕의 요동군소속
③고구려 요동군 소속
④당나라 요주소속
⑤遼, 金의 遼陽
⑥遼, 金의 東平郡 치소 南京 東京
⑦遼, 金의 遼陽府治所
⑧元나라 遼陽省 遼陽路 治所
⑨明나라 遼東都指揮使司 치소
⑩淸나라 初의 東京. 후에 동경을 瀋陽(盛京: 감숙慶陽)으로 옮김
⑪淸순치10년 요양부설치. 부곽을 심양에 설치하고 요양부를 이전 했는데 성경이라고 고쳤다.
⑫강희간에 요양부를 奉天府로 고치고 盛京州로 했다.
⑬중화민국 때 현으로 고치고(심양현, 승덕현) 봉천부 요심도인데 지금은 요녕성이다.
※여기까지는 감숙성이다. 중화민국이 감숙성에서 요녕성을 만들어 동북 북부로 이동했다가 1927년에 신만주로 이동했다.

2). 요양현((遼陽縣):
(한서지리지 기록) “요양현은 대량수가 서남쪽에서 요양에 이르러 요수로 들어간다. 왕망 때는 요음(遼陰)이라고 했다.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莽曰遼陰)“
※대단히 중요한 역사지명인데 원래위치를 말살하고 숨겨서 정화한 위치를 분명하게 찾을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설왕설래하면서 문제도 많은 지명이다.
지도에는 요양이 요동반도 한 곳에만 있는데 신만주 요녕성은 1927년에 설치되었고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후 구만주 역사를 신만주로 이동 조작했으므로 고대의 역사무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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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위치찾기:
4. 요양현((遼陽縣)((중국고금지명대사전 P.1246):
“한나라 때 설치했고 후한 때는 그대로 썼다. 진나라 때 폐했다. 한지와 수경주에는 옛 성이 당시에는 지금의 요녕 요양현 서북의 량수와 혼하가 합류하는 곳에 있었다. 지금 요양현 치소인데 요나라, 금나라의 요양이다.
“ 진나라 요양( 陽)현인데 후위 때 요양(遼陽)이라 했다. 요산현조에 상세하다.
“ 진나라, 한나라 때의 요동군이다. 진나라 대흥초에 모용외가 살았다. 후연 때 고구려 땅인데 수나라는 그대로 했고 당태종 때 고구려와 싸웠는데 그 땅을 요주로 했다. 요나라 초에 동평군 치소를 요양현으로 했다가 후에 승격시켜서 남경으로 했다가 다시 동경으로 하고 요양부를 두었는데 금나라는 그대로 했다. 원나라가 요양로라고 고쳤고 명나라의 요동도지휘사사다. 청나라 초의 동경이다.
순치 10년 요양부를 설치하고 요양현 부곽을 병설했다. 심이 부를 성경으로 이전하고 봉천부로 했다. 강희 간에 (성경)을 주로 승격하고 봉천부로 소속시켰다. 중화민국 때 현으로 고치고 봉천 요심도인데 지금의 요녕성이다.(漢置. 後漢因之. 晉廢. 以故城當在今遼寧遼陽縣西北. 梁水渾河交會之處. 今遼陽縣治. 卽遼金之遼陽也.
晉 陽縣, 後魏曰遼陽. 詳見遼山縣條.
秦漢遼東郡. 晉大興初慕容 所據. 後燕時地入高句麗. 至隋因之. 唐貞觀中克高麗. 以其地爲遼州. 遼初東平郡治遼陽縣. 後升爲南京又改爲東京. 置遼陽府. 金因之. 元改遼陽路. 明遼東都指揮使司. 淸初東京. 順治十年置遼陽府幷設遼陽縣附郭. 尋府移盛京爲奉天府. 康熙間升爲州. 屬奉天府. 民國改縣. 舊屬奉天遼瀋道今屬遼寧省)“ ( :외)
(해설)
(해설)이 문장을 3개로 나누어보면
①번의 요녕요양현은 감숙성, 산서성, 신만주 3개소인데 산서성과 신만주는 손문정부와 일제가 조작한 역사이고, 요나라, 금나라의 요양은 감숙성 뿐 이므로 무시한다.
②번은 산서성 동남부遼山, 遼州, 遼縣인데 원래의 요양( 陽)을 변조한 것이므로 무시한다.
③번은 감숙성인데 요동군, 요주, 동평군, 요양부, 봉천부, 최초의 요녕성에 소속된 곳이다.
“요녕 요양현 서북의 량수와 혼하가 합류하는 곳“은 감숙성, 산서성, 신만주 3개소에 공존한다. 그러나 요양은 감숙성과 신만주 2개소에 있고 遼州, 遼縣은 산서성 동남부다.
梁水에 대한 지리지기록은 산서성 동남부 청장수 뿐이다. 원래위치는 기록에 없다. 渾河는 1).감숙성 동가강, 2).감숙성 동계 곤마령지역의 강(송화강), 3).감숙성 압록강 4). 산서성 상건하(영정하), 5).요동반도 심양남쪽 등 5개소다. 그러므로 기록으로 보면 량수와 혼하가 만나는 곳은 감숙성 대량수와 압록강이다.
그런데 혼하를 압록강으로 보면 감숙성과 산서성(영정하) 두 곳에 있는데 압록강은 요수도 되므로 산서성의 영정하는 동서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요수가 될 수 없다. 또 “지금 요양현 치소인데 요나라, 금나라의 요양이다.” 고 했는데 요나라는 산서성에 존재한 일이 없으므로 결론적으로 량수와 혼하가 만나는 곳은 감숙성의 압록강과 량수 뿐이다. 또 혼하는 여러 강에 혼용된 지명이므로 일정하게 규명되지 않는다. 본류인 압록강, 송화강 등이 있고, 지류로 볼 때도 감숙성 해성북쪽의 태자가, 요양북쪽의 량수, 해성남쪽의 동가강 등이다.
“요나라 초에 동평군 치소를 요양현으로 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遼東郡 기록에는 진(晉)나라 요동국이고, 東平郡기록에서는한나라 요동국이라고 했으므로 漢, 後漢, 晉나라가 다 요동국으로서 요동군과 동평군은 같은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요동군 치소는 양평현(요동성)이고, 동평군 치소는 요양현이다. 그런데 “양평은 요양북쪽 70리에 있다“고 했으므로 양평과 요양은 같은 곳이 아니다.
동평군기록에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의 동평군은 산동성이라고 했으므로 역사무대를 이동 조작했음을 알 수 있다.
“요나라가 동평군을 남경으로 했다가 동경으로 고쳤는데 치소가 봉천요양현 치소다“ 는 동평군에 청나라가 봉천해룡부소속동평현을 설치했는데 중화민국이 동풍현(東 縣)으로 고쳤다.
요양현이 중화민국 때 봉천요심도 소속인데 遼瀋道, 東邊道 등은 감숙성에서 만들어 신만주로 이동했다. 그러므로 요나라 동평군 요양은 감숙성이다.
진나라 요양( 陽), 후위 때 요양(遼陽), 요산현(遼山縣)은 후세에 이동조작한 것을 쓴 산서성 동남부기록이다.
청나라 순치 때 요양부의 부곽을 심양에 설치하고 요양 지역에 있던 동경(요양)을 이전했으며 성경으로 삼고 요양부를 봉천부로 고쳤다. 성경으로 천도하려고 했으나 3대 세조가 요동군의 연경으로 천도했다.
요양현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종합하면:
①요양은 당나라 요주이다.
③요양은 개주소속 해성이라고도 이해되는데 해성이 요양이라고 못 박아 기록한 것은 없다.
③감숙성 국내성서북 300여리에 해성, 해성북쪽 70리에 요양, 요양동쪽 70리에 백암성(암주), 요양경계 서남쪽 15리에 안시성, 안시성남쪽에 건안성, 요양동남 60리에 원래의 橫山(華表山으로 바꾸고 橫山은 섬서성으로 이동조작), 요양동남 140리에 석문산(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이 출발한 곳), 요양북쪽 70리에 요동성(양평, 창평), 요동성 서남 90리에 창려(북경), 창려(북경)서남 120리에 노룡이다. 이 위치가 한국과 중국 전체에서 맞는 곳은 감숙성 한 곳 뿐이다.
감숙성의 요양이 요, 금, 청나라의 동경이므로 요, 금, 청나라의 초기위치는 요양의 서쪽 땅인 감숙성 서황하 서쪽의 요서 땅과 그 북쪽의 내몽고다.

5. 요양부(遼陽府)((중국고금지명대사전 P1246):
“요나라가 설치하고 금나라는 그대로 했다. 원나라는 요양성으로 했다. 지금 요녕 요양현 치소다.(遼置. 金因之. 元爲遼陽省. 卽今遼寧遼陽縣治)”
※한나라 양평성(창평현)은 고구려요동군 치소인 요동성인데 요양이북 70리에 있다고 했다. 중요한 지명인 요양이 고지도에 없는 것은 그 지명들을 이동시켰기 때문에 원래위치를 모르게 삭제한 것이다.

6. 요양로(遼陽路)(중국고금지명대사전 (P.1246):
“원나라가 설치한 것은 지금 요녕 심양현 以西이고 북진 이북이다. 요양성의 치소이다. 치소는 요양인데 지금 요녕 요양현 치소다. (元置. 今遼寧瀋陽以西. 北鎭以北地. 遼陽省治焉. 治遼陽. 今遼寧遼陽縣治.)”
※원나라 요양성요양로 치소는 요양현이고 개원以西이며, 심양로는 개원以東이고 치소는 瀋陽縣(경양)이다. 그런데 “심양 以西이고 북진以北이다“고 기록한 것은 신만주로 이동조작한 기록이다(P.46 신만주탄생개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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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절. 요동군의 약식검토:

1. 역사의 원칙
요수는 좌우로 경사졌더라도 반드시 남북방향으로 흘러야 한다. 그래야 요동과 요서가 성립된다.

2. 지리적 조건
①요수는 당초의 낙랑 땅에 있고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일천여리의 대강이어야 한다.
②후에 낙랑 땅을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대방군으로 쪼갰을 때는 현토군을 통과해야 한다.
③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검토에서 遼東은 고구려 땅이고, 고구려 중심은 현토군이다. 遼西 땅은 토곡혼, 수, 당, 토번 땅이다.
④요동군에는 북경(북평)이 있고, 현토군에는 평양(국내성, 왕험성)이 있다.
⑤하북성 또는 하북성 북부 땅에서는 이러한 조건이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다.

3. 결론
산서성, 하북성 또는 산서 - 하북의 북쪽 땅에서는 이러한 원칙과 지리적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신만주와 한반도 북쪽에서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동군이나 한 4군은 산서성 중앙황하 서쪽 땅 즉 섬서성, 감숙성, 청해성에서 찾아야 한다.
한서지리지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등 모든 중국기록들은 조작된 가짜이다. 이렇게 조작된 기록으로 보고 단순하게 지명만 찾는 공부는 왜곡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엉터리 공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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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낙랑군평양과 패수위치
3. 험독현(險瀆縣) :
“한나라가 설치했는데 후한은 그대로 했다. 응소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라고 했다. 물이 험해서 험독이라고 했다. 신찬은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이것이 험독이다. 안사고는 신찬의 말이 맞다고 했다. 당시에 지금의 요녕성 반산현 경내의 강변 땅이다.(漢置後漢因之. 應 曰朝鮮王滿都也. 依水險故曰險瀆. 臣瓚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瓚說是也. 當在今遼寧盤山縣境內濱海之地)“(중국고금지명대사전 P.1251)
(해설)
“조선왕위만의 도읍”
단국의 번한성, 고조선의 번조선 도읍 번한성, 기자의 초도, 위만의 도읍 왕험성, 고구려 3평양 중의 하나로서 모두 같은 곳이니 여기까지는 원래의 감숙성 평량이다.
“물이 험해서 험독이라고 했다.“
서남쪽 공동산에서 나오는 물(潮水: 涇水)이 물살이 거세고 자주 홍수를 일으키니 험독이라고 했다.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왕험성이 패수 동쪽이므로 패수는 왕험성 서쪽에 있다.
왕험성 서쪽에는 환도산에서 나오는 감숙성 위수 북상류 뿐이다. 그러므로 패수(위수북상류 )동쪽에 왕험성평양(험독)이 있으니 정확하다.
“지금의 요녕성 반산현 경내의 강변(해변가) 땅이다“
요녕성은 감숙성, 산서성과 하북성의 북쪽, 신만주 이렇게 3개소가 있는데 구만주인 감숙성에서 1932년에 일제가 만든 신만주로 역사를 통째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모든 지명과 국가가 각각 3개소에 3개씩 있다. 이것이 현재 중국과 한국의 역사책이다.
중화민국 당초의 요녕성은 감숙성에서 만들어서 동북으로 이동시켰는데 마지막으로 신만주 요녕성은 1927년에 설치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신만주 요녕성 반산현 경내의 해변가 땅이다“로 인식시키기 위한 조작임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의 반산현은 육반산맥이 있는 감숙성이다.
평양 서쪽에 육반산맥이 있어서 그 지역에 있는 현을 반산현이라고 하며 상고시대에서 고대까지는 그 지역에 홍수가 나면 현재의 경수(涇水)가 작은 호수처럼 되므로 “바다 해(海)”자를 쓴 것이다. 또 중국의 모든 역사책에 나오는 “해(海)”자는 “동해”와 “북해“ 란 단어 외에는 무조건 호수와 강으로 해석한다.

3-1. 패수(浿水):
”북부여 시조 해모수 38년(BC.202)연나라 노관이 다시 요동의 엣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서 경계선을 삼았으므로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 河)다.“(환단고기 북부여기)
(해설)
이 문장은 다 맞으나 “오늘의 난하다”고 한 것은 하북성 난하를 쓴 것이므로 조작기록이다. 원래의 패수는 난하가 아니며 원래의 난하는 감숙성 압록강(수나라 상건수)의 다른 이름이다.

3-2. 패수:
“한(漢)이 일어나자 조선은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축하여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燕)에 속하게 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해설)
한나라는 청해성이므로 동쪽경계인 서황하(대요수) 상류동쪽의 요동 땅은 당시로서는 멀다. 연나라는 서황하상류 서쪽이다. 그래서 서황하 상류∼ 동쪽 패수사의 땅을 연나라에 붙여준 것이다.

3-3. 패수:
"연왕(燕王) 노관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연에서 망명하여 1천여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입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요새 밖으로 나아가 패수를 건너 본시 진대(秦代)의 공지(空地)였던 땅을 근거로 한(漢)의 요새부근을 왕래하면서 진번조선의 만이(蠻夷) 및 그전에 연(燕), 제(齊)에서 망명한자들을 거느리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연, 제, 조나라 사람들이 피난지에 온 수만명을 규합하여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왕이 되었다(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而燕人衛滿擊破準自王朝鮮)”(후한서85-9)
(해설)
한4군의 진번군(진번조선)은 BC108년 한무제가 빼앗아 군을 설치하니 피난민이 이동해 온 것이다. 기자조선의 서쪽에 붙어있었던 연나라, 제나라에서도 피난민이 왔다. 이들을 위만이 규합하여 기자조선을 탈취한 것이다. 후에 진번은 북부여가 차지하니 대략 30여년만인 소제(BC.86-74) 때 요동 땅 서북구석에 겨우 2현으로 축소하여 설치했는데 위만이 일시적으로 공격했어도 북부여에게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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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4. 평양의 지리적 조건

왕험성평양의 지리적 조건은 200여리 안에 고원, 평량, 화평, 융덕이 있고, 청나라 반산청반산현에 있는 조수(潮水: 험독)변에 있는데 북쪽으로 200여리 이내에 환도산, 환도성, 국내성이 있고, 남쪽에는 300여리에 롱산( 山)이 있고, 동북 300여리에 고구려 경주(慶州: 慶陽)가 있고, 서쪽100여리에 남북으로 천여리의 육반산맥이 있고, 육반산맥 서쪽 200여리에 패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곳에는 평양이 존재할 수 없다.
즉 패수는 평양서쪽 300여리에 있다. 한반도가 될 수 없다.


목차


머리말/5
차례/11
제1장 요동군/13
제1절 요동군 18현 기록과 위치/15
제2절 요동군 위치찾기/22
1. 요동군/22
2. 요동군 결정사항 4가지/27
3. 봉천이 감숙성이란 증거/28
제3절 양평현 위치찾기/31
제4절 요양현 위치찾기/40
제5절 신창현 위치찾기/47
제6절 요동군 약식검토/49

제2장 요서군/55
제1절 한서지리지 기록/55
제2절 요서군 14현 위치찾기/57
제3절 요서군의 결론/71

제3장 현토군/73
1. 한서지리지 기록/74
2. 현토군 3현 위치찾기/77
3. 현토군의 결론/81

제4장 낙랑군/83
1. 한서지리지 기록/84
2. 낙랑군 25현 위치찾기/87
3. 낙랑군의 결론7/96

제5장 낙랑군 평양과 패수위치/99
1. 낙랑군/100
1-1. 조선현/102
1-2. 낙랑군왕험성/102
1-3. 평양/103
2. 낙량군/106
3. 험독현/107
3-1. 패수/108
3-2. 패수/109
3-3. 패수/109
4. 반산현/112
4-1. 육반산/113
4-2. 고원현/114
4-3. 감숙성 경원도/114

결론1. 기록요점/118
결론2. 평양과 패수/118
결론3 요동요서와 한 4군./119
결론4. 평양의 지리적 조건/119
결론5. 지구변동과 고지대의 역사/120
결론6. 한, 중 역사의 실체/127
참고도서/128
저자소개/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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