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수호전』을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연의』를 읽지 말라?”
한 권으로 읽는 108 수호 영웅의 활약상과 흥망,
다면적인 캐릭터와 다채로운 풍속도가 펼쳐지는 장르콘텐츠의 원형을 찾아서
기기묘묘한 옛날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졌는가?
주자학의 도그마에 갇혀 있던 시절에 『수호전』은 “도둑질을 가르친다”며 종종 금서로 지목되곤 했다. 하지만 금서 조치는 결국 행정적 액션에 그쳤을 뿐, 독서의 열기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왕 정조가 “근래 잡서를 좋아하는 자들이 『수호전』은 『사기』와 비슷하고 『서상기』는 『시경』과 비슷하다고 한다”며 비판하고, 정약용이 “요즘 뛰어난 선비들이 대부분 『수호전』, 『서상기』 같은 책에서 발을 빼지 못한다”고 우려해도 소용없었다.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시작된 ‘미디어 혁명’으로 출판 인기 아이템이었던 소설류 중 특히 ‘수호열水滸熱’의 독서광풍이 조선의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가 되었던 것은 당연지사. 처음에는 악평을 퍼붓던 허균조차 『수호전』의 뛰어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간 사신들의 연행록에도 『수호전』에 등장하는 지역을 지나면서 감상을 남기거나 수호 이야기 공연을 본 견문 등이 언급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이처럼 수백 년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널리 읽혀온 『수호전』은 영웅소설 계통은 물론 근대의 무협소설, 특히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 진융金庸의 소설 등에까지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재생산되어왔다.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수용되고 있는 『수호전』의 장르콘텐츠로서의 원형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장편 역사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쓴 에드워드 리튼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에서는 최신의 연구서를 읽고, 문학에서는 가장 오래된 책을 읽어라.”
“문학에서는 가장 오래된 책을 읽어라”
108마왕이라고 이름 붙여진 다크히어로형 캐릭터들이 마침내 양산박에 모여들어 영웅이 되었다는 스토리가 천고의 4대 기서 중 한 권으로 꼽힌 까닭은 무엇일까? 봉인이 풀려 세상에 나온 108마왕은 살인을 저지르고 인육을 팔고 저잣거리에서 행패를 부린다. 심지어 여성 혐오적 혹은 여성 기피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일그러진 욕망의 이면을 보여준다. 108영웅 중 세 명의 여자 두령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대상화된 부차적인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이들 외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개 요녀, 악녀로 묘사되면서 잔혹한 죽음을 맞았다. 결국 그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오직 ‘형제들’이나 가족이 희생을 당한 경우에 국한되며, 그 이외의 생명들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충의’라는 명분이 더해지고 나서야 이들은 도적을 넘어 의적, 나아가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한 가지. 위의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이는 『수호전』의 캐릭터들은 물론이고 그 플롯이나 모티프, 서사 기법 등이 하나의 ‘문법’으로 자리잡았음을 증거한다. 14세기의 『수호전』에서 비로소 완성된 모습을 갖춘 무협소설은 중국 문학의 중요한 전통으로, 이후 진융이 이어받아 현대적 대중문학으로 발전된 셈이다. 『수호전』은 지금도 무협소설 등 각종 문학작품은 물론 새로운 매체와 결합된 웹소설, 웹툰, 게임, 영상물 등으로 국내외의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게임의 경우, 『수호전』이 워낙 좋은 소재로 가득한 환상소설이었기 때문에 게임이 발전할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 무협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편 무협소설 『수호전』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수많은 게임들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국내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2014년)는 21세기에 한국적 맥락에서 리메이크된 영상 『수호전』이라 할 만하고, 오랫동안 어린이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유희왕 카드게임 캐릭터에는 ‘염왕炎王’이란 시리즈 명칭하에 『수호전』의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미로 같은 『수호전』을 안내하는 길잡이
『수호전』이라는 소설이 하나의 고전적 독서물로서 우뚝 서게 된 시기가 명대 후기였고, 근대 이후에는 민중 봉기를 소재로 한 진보적, 심지어 혁명적 사상을 담은 작품으로 재평가되기도 하면서 한때 정치적 몸값이 치솟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송강이 투항파의 상징으로 몰리는 정치적 수난을 겪기도 했다.
난세일수록 민중은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법이다. 양산박 호한들의 이야기 또한 민중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염원을 기탁하는 방식에서 닮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신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를 기울게 한 간신 세력은 건재했고, 양산박 무리는 어쨌든 현세에서는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비판의 화살이 끝내 간신들에게로 쏠리고 수호 영웅들의 이야기는 레전드가 되어 오래도록 계속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수호’ 곧 세상의 가장자리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세상을 재건하려 했던 수호 영웅들의 의기투합과 장쾌한 꿈은 이로써 민중 나아가 민족의 신화가 되고, 그들이 신으로 부활함으로써 양산박 또한 상상의 해방구로서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수호전』은 단숨에 독파하기에는 버거운 상당한 볼륨의 장편소설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다뤄지는 사건도 다양하며 이야기 전개도 단선적이지 않다. 성과 이름을 가진 인물만 900여 명에 이르고 서로 다른 인물이 중심 역할을 하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이야기들이 엮여 있다. 그러다 보니, 읽는 과정에서 더러 미로 속에 놓인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완독을 해도 전체적인 틀을 파악하는 데에 다소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이 책 『수호전, 별에서 온 영웅들의 이야기』는 『수호전』의 넓은 스펙트럼을 즐길 수 있도록 작품의 주요한 면면들을 꿰뚫어 충실하게 풀어냈다. 이 미로와도 같은 『수호전』 읽기를 안내하는 최고의 길잡이라 할 것이다. 특히 400년 이상 한국에서도 꾸준히 인기를 이어온 『수호전』이 어떻게 문화적 자양분이 되고 한국적 맥락으로 변용되었는지 살폈다.
덧붙임: 무협소설의 원조를 소개하는 『수호전, 별에서 온 영웅들의 이야기』와 상상력과 환상성의 진가를 엿볼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의 원류를 소개하는 『수신기, 괴담의 문화사』에 이어, 이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살아-잇기’ 위한 프로젝트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