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니체를 만나
다양한 문화적 갈래와 정신사적 지형도를 그리다
동북아시아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아편전쟁, 메이지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사조약, 한일합병 등 여러 역사적 사건들로 대표되는 많은 변화를 겪은 격변의 시기였다. 니체(1844~1900)는 이 시기에 러시아에 유입되어 일본에 소개되었고 일본에서 중국과 대한제국으로 전해졌는데, 이 책은 그 과정을 추적하고 수용 초기의 니체 사상이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정신사적 의미를 갖는지 밝힌다.
‘정신사’란 역사를 형성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정신’을 지목하고 그 정신을 고찰하는 역사학을 말한다. 니체의 사상은 동북아시아에 소개되었을 때 각 지역 국가의 ‘정신’과 만나 변이되어 새로운 ‘정신’을 논의하는 데 기여했다. 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 사회진화론과 주체적 문명 형성, 신민과 입인사상 등 니체를 언급하며 이뤄졌던 논의들엔 자아실현과 건강한 개인의 삶, 평등과 공존의 가치, 힘의 논리처럼 오늘날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와 닮은 부분도 많다. 그러므로 니체 수용 초기 동북아시아의 정신사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 정신사의 연대기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세계표준판 니체전집 한국어본(전 21권, 책세상) 편집위원인 김정현 교수(원광대학교)가 책임을 맡고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HK+인문사회연구소의 연구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이전까지는 니체의 사상이나 텍스트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니체 수용사는 다양한 영역과 연관되어 있기에 국가의 경계를 낮추고, 철학 외의 영역도 다룰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별 연구 결과를 한데 묶기보다 연구소의 구성원들이 자료 수집 단계부터 함께하여 다 같이 원전을 읽어가며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이를 위해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 독일 등 여러 국가에서 공부한 저자들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니체 수용사 중 초기에 해당하는 1890년대와 1900년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함께 검토했다. 국회도서관과 인터넷을 통해 확보한 연구서와 자료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독일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저자들이 현지의 지인과 대학 도서관을 통해 구한 원전을 번역하여 읽고 논의해 만들었다.
또한 철학, 문학, 역사, 정치사상, 한국사상, 신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한 저자들이 오랜 시간 함께 논의하고 연구하며 집필해 더 풍성하고 깊이 있는 내용이 담겼다. 개별 지역 국가로 한정되어 있거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닌 사상적 변화와 정치 상황, 시의적 문제, 각 지역 국가의 역사, 국제 정세를 통찰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에 대한 관심이 만들어낸 이 책은 니체와 동북아 정신사의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니체, 그리고 톨스토이, 루쉰, 이광수…
동북아시아, 니체를 만나다
1장에서는 러시아에 처음 니체가 유입된 때부터 20세기 후반까지의 니체 수용사를 살펴본다. 니체와 대비해 톨스토이 사상을 긍정적으로 평했던 니콜라이 그롯의 해석을 중심으로 검열, 금지, 비판, 번역 과정 등 당시 러시아에 있었던 니체 텍스트와 관련한 이슈를 포괄해 전체 흐름을 정리했다.
일본에 니체가 소개된 것은 니콜라이 그롯의 제자였던 고니시 마스타로에 의해서였다. 2장에서는 고니시 마스타로를 중심으로 일본의 니체 유입 과정과 그 지성사적 분위기를 조명한다. 그리고 일본 니체 수용의 효시가 된 고니시 마스타로의 사상적 지향성과 니체 수용으로 인해 문학계에 일었던 반향 등을 함께 분석했다. 이어 3장에서는 일본에서 니체가 논쟁적 담론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니체가 유입된 후 일본에 일어난 ‘니체 신드롬’과 그 중심에서 개인주의를 주창하던 다카야마 조규의 시각을 정리하고, 그의 문제의식이 형성된 배경, 평론 활동 등을 소개한다. 4장에서는 조규 이후 일본의 니체 수용사 중심에 있던 우키타 가즈타미의 애기/애타 해석과 윤리적 제국주의론의 연관성을 역사학적으로 추적한다.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기에 유입된 ‘개인주의’가 근대 일본 지식인에게 미친 영향을 살피며 이기심과 이타심 및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논한다.
‘니체 신드롬’이 일어났을 때의 일본에는 무술신정 개혁에 실패한 후 망명한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이 있었다. 5장에서는 그중 중국에 니체를 소개한 량치차오의 시각을 사회진화론과 연관해 해석한다. 량치차오의 글을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개체와 군체, 개인과 사회, 노예로부터의 해방과 영웅의 탄생 등을 언급하며 니체와 량치차오가 공유하던 문명의 변혁사상, 중국의 정치 주체가 될 ‘신민’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6장에서는 ‘중국의 니체’로 알려진 루쉰이 1920년대 중국 문학계의 중심에서 니체를 ‘중국화’하는 과정과 중국에서 ‘니체 열병’이 일어나는 과정을 다룬다. 또 루쉰에서 선총원에 이르기까지 니체의 사상이 중국 현대문학에 도입, 해석되고 현지화되고 전파되고 깊어지는 역동적 중국화 과정을 살펴본다.
한국, 당시의 식민지 조선에 니체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식민지 조선의 젊은 유학생들을 통해 알려질 수 있었다. 7장에는 이러한 1910년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이 최초로 니체를 언급하고 논의한 내용을 설명한다. 일본을 통해 전래되어 ‘다이쇼 생명주의’라는 배경을 가진 채 식민지 조선에 유입된 니체를 재일 조선유학생들이 어떻게 변용하여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는 고뇌와 문제의식이 함께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