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작가
한승원이 마침내 완성한 ‘조선 천재 3부작’
『추사』 『초의』 『다산』을 다시 읽는다!
한승원 소설가는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으로 등단하여, 반세기가 넘도록 소설을 써오며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들을 수상하고, 수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소설가는 흘러 다니는 말이나 기록(역사)의 행간에 서려 있는 숨은 그림 같은 서사, 그 출렁거리는 파도 같은 우주의 율동을 빨아먹고” 산다는 한승원의 말처럼, 역사 속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내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집요함은 한 시대의 공기, 바람과 햇살, 심지어는 역사적 인물의 숨결까지 살려내 소설에 담아내기에 이른다.
한승원이 평생에 걸쳐 좇아온 ‘조선 천재’ 3인의 평전소설 『추사』 『초의』 『다산』이 열림원에서 새롭게 출간된다. 개정판엔 집필 당시에 “내가 김정희인지 김정희가 나인지 분별이 안 될” 경지의 몰입으로 꿨던 꿈에서 만난 추사와의 대담을 해설의 형태로 풀어 덧붙였다.
‘신필神筆’ 뒤에 가려져 있는
전혀 또 다른 김정희의 얼굴
나는 추사 김정희의 ‘신필神筆’ 뒤에 가려져 있는 전혀 또 다른 김정희의 얼굴, 잘못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제대로 흘러가게 하려다가 다친 과정과 유배지에서 아파하고 슬퍼하면서도 치열하게 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주고 싶어 이 소설을 썼다.
- ‘초판 작가의 말’에서
추사는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로 삼정이 문란해진 부정부패 매관매직의 시기에 세상을 개혁해보려고 고투하다가 제주도 유배 9년, 북청 유배 2년의 쓰라린 삶을 살다가 과천에서 생을 마쳤다. 나는 한 인간의 절대 고독과 개혁 의지와 유배지에서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사약에 대한 불안과 신산한 삶 속에서 꽃피운 추사체와 〈세한도〉 〈불이선란〉 같은 예술작품, 그리고 절망적인 삶에서 정신을 북돋워준 초의의 우정에 초점을 맞추어 수정 가필하여 개정판을 낸다.
-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신필神筆,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삼절三絶, 스물네 살에 중국 연경에 나가 선진문물을 배워온 엘리트 출신의 북학파北學派…… 추사 김정희는 학문에서나 예술에서나 정치에서나 특출난 재능을 보여주는 시대의 천재였지만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오만하고 타협할 줄 모른 까닭으로 세상으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아, 50대 후반부터 제주도 유배 9년, 북청 유배 2년의 신산한 삶을 살게 된 것”이라는 추사에 대한 평가를 읽고, 한승원은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오독인가를” 짚으면서 “잘못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제대로 흘러가게 하려다가 다친 과정과 유배지에서 아파하고 슬퍼하면서도 치열하게 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주고 싶어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추사는 청년 시절과 말년에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 젊어서는 “잘나가는 선지식 찾아가 깨부수는 천둥벌거숭이”였던 그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굴절된 학문과 예술,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부정부패한 권력 앞에 조금도 굽히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선승 해붕과 백파와의 돈오 점수 논쟁, ‘조선의 글씨’라 일컬어지는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 비판, 김조순 김좌근을 비롯한 안동 김씨 세력과의 팽팽한 대립…… “살아간다는 것은, 화해 없는 영원한 싸움을 치르는 것”이라는 소설 속 추사의 말처럼 그의 삶 매 순간은 “그림자 같은 적들”과의 투쟁이었다. 꼿꼿하고 올곧은 탓에 꺾이지는 않을까 싶은 위태로운 순간마다 그의 모난 성정을 부드럽게 눅여준 것은 글씨 쓰기와 난 치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나눈 벗 초의와의 향기로운 우정이었다.
추사 김정희, ‘오만한 천재’의 오명을 벗다
신산한 운명에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들
안동 김씨와의 정쟁으로 죽을 고비에 처했던 추사는 결국 도합 11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하지만, 그의 말년은 결코 비참하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지옥이 따로 없”는 “몇 억만 격랑의 험악한 물너울”을 지나고, “겨울의 혹한이 무서운 천 리 밖”일지라도 추사의 곁에는 늘 추사의 사람들이 있었다.
죽을 위기의 국청에서 그를 건져준 벗 조인영 권돈인부터, 권력에 기대지 않고 서첩과 지필묵을 아낌없이 보내오는 오규일 이상적, 짙은 사제 간의 정으로 화첩을 들고 얼굴을 비추는 그림쟁이 소치 허유와 조희룡,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가슴 뭉클한 사향을 번져뜨리는 여인 초생, 평생에 아픈 손가락이었던 서얼 아들 상우, 그리고 “물 흐르듯 꽃 피듯” 살아가는 해탈을 가르쳐준 초의까지…… 세간에 알려진 ‘오만한 천재’라는 오명과 달리, 추사는 꼿꼿한 선비면서 한편으로는 스승, 벗, 제자와 뜨거운 정을 나누는 ‘한 사람’이었다.
한승원이 “추사의 빼어난 아름다운 글씨와 그림과 간찰과 시에서” “아픈 역사의 행간을 읽어내고” 그린 추사의 ‘진짜’ 생애를 보고 있으면, “역사를 읽되 문자에 걸리지 말고, 행간에 숨어 있는 것들을 깊이 확철하게 읽을 줄 알아야만” 자신의 말년의 삶을 분명히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추사의 묵직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추사 김정희의 내면과 더불어 나의 내면을 깊이 읽으려고 애”쓴 끝에 마침내 한승원은 추사의 숨결까지 오롯이 복원한 이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추사 생각, 산책을 하면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추사 생각을 했다. 새 한 마리 날아가는 것, 벌레 한 마리 기어가는 것, 먼 바다에서 달려오는 파도, 구름 한 장 흘러가는 것들을 추사의 눈으로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을 추사의 코로 냄새 맡고, 솔바람 소리, 풍경 소리, 염불 소리, 버들숲에서 우는 꾀꼬리 소리를 추사의 귀로 들으면서, 추사의 뇌가 방사하는 파장을 따라 사유했다.
그러다가 추사가 된 꿈을 꾸었다.
-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