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거기 머무는 내내 외톨이였다
첫날 밤부터. 비명과 피, 복수로 얼룩진 그날 밤부터
이탈리아 북부, 깊이를 알 수 없는 코모 호수. 인근에서 쓰레기 수거 일을 하는 ‘청소하는 남자’는 어느 날 아침 호숫가를 지나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소녀를 구해준다. 자살을 기도한 그 소녀는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진 집안의 외동딸이지만, 또래 남학생에게 끔찍한 폭력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한 이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투명 인간처럼 살아가던 남자는 자신을 ‘수호천사’로 여기는 소녀를 보고 난생처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한편, 소녀가 물에 빠진 그 호수에서 신원 미상의 팔 하나가 떠오른다. 학대 피해 여성들을 돕는 ‘사냥하는 여자’는 현장 주변을 맴돌며 정보를 캐다가 팔의 주인이 중년의 독신 여성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간 지역에서 비슷한 외모와 연령대의 여성들이 다수 실종되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다. 그리고 호숫가에서 발견된 팔과, 며칠 전 소녀를 구한 베일에 싸인 영웅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심연 속의 나》에서 도나토 카리시는 악의 ‘심연’으로 더욱 깊이 파고든다. 위험에 빠진 소녀를 구하고 홀연히 사라진 ‘영웅’. 홀로 사는 중년 여성만을 노리는 잔혹한 ‘연쇄살인마’. 상반된 두 인격을 한 몸에 지닌, 가장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한 남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파괴되고, 우리가 ‘절대 악’이라 부르는 존재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던 아동 학대 피해자에서 이중인격의 살인마로 변해버린 남자.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타인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학대 피해자를 돕는 일에 매달리며 속죄해온 여자. 부모의 무관심과 N번방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성 착취에 고통받는 소녀. 그리고 이 모든 고통과 폭력을 외면하는 사회……. 도나토 카리시는 자신이 연구한 다양한 범죄 케이스를 소설 속 일화에 녹여내, 타인의 아픔에 눈감음으로써 가해자의 행위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무심한 사회를 비판하고, 범죄를 자극적인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린다.
어느 실제 사건 못지않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이탈리아 현지 독자들로부터 ‘작가로서의 진화를 보여준 작품’으로 호평받은 《심연 속의 나》. 도나토 카리시는 이 소설을 〈안개 속 소녀〉 〈미로 속 남자〉에 이어 세 번째 영화화 작품으로 낙점했고, 2022년 가을 이탈리아 현지에서 공개하며 다시금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심연 속의 나》를 읽으면서 범죄학자,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영화감독으로 다채로운 변신을 시도해온 그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상상해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프랑스 스릴러 분야에서 독보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꼽히는 프랑크 틸리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허구의 세계 속에 구축된 소설의 배경과 묘사가 극도로 현실적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라고. 이렇게 까탈스러운 독자들을 두루 만족시키는 작품을 쓰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도나토 카리시는 바로 그런 소설에 근접한 작품을 써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는 그런 소설을 영화로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