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업자의 말
10년 전쯤 여행지의 바다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순식간이었다. 얕은 물에서 놀다가 파도에 휩쓸렸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점점 멀어져 작은 인형처럼 보일 때까지 떠밀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거의 소년에 가까운 청년 하나가 알지도 못하는 나를 구하러 헤엄을 쳐서 와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 맨몸이었고, 이제는 두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양이 되었다. 그 뒤에 다른 사람들이 카누를 타고 우리를 구하러 왔고 나는 무사히 구출되었다. 그날 이후 종종 깊은 바다에 빠지는 꿈을 꾼다. 발밑의 물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귀가 아프도록 먹먹한 바다의 적막 속으로 가라앉게 되리라는 것을 일순간 깨닫는다. 나는 두려움에 압도된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어린 다마리스를 생각하며 저 바다를 떠올렸다. 얼른 그날의 매를 맞으려 삼촌의 곁에서 기다리는, 한 번도 울지 못한 아이. 그 아이의 세계 전부를 채우는 거대한 고독과 절망과 수치심을 생각했다. 혹독하고 척박하고 매정하고 언제나 그 무엇보다 더 큰, 바다와 밀림을 생각했다. 그렇게 홀로 바다와 밀림에 둘러싸인 채 어른이 된 다마리스의 삶에 개가 나타난다. 그리고 “개는 그녀의 것이었다.”라는 한 문장에 담겨 있는, 담길 수 없이 수없는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라 뻬라(la perra)는 스페인어에서 개의 여성형 명사로 암컷인 개를 지칭하는 말이다. 스페인어로 개를 뻬라라 부를 때는 다른 의미가 끼어들지 않는다. 그저 수컷은 뻬로, 암컷은 뻬라라 부를 뿐이다.(물론 추상적인 개는 남성형인 뻬로다.) 한국말로는 개가 암컷이라도 매번 성별을 밝혀 ‘암캐’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뻬라’는 대부분 그저 ‘개’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여성에게 쓰는 욕이기도 하므로 제 목에서는 남겨두어야만 했다. 아마도 이 제목을 듣고 그 생각을 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섹스를 파는 여자, 감히 원하는 여자, 자식을 돌보지 않는 여자, 나돌아다니는 여자.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고 난잡하고, 그리하여 나쁜 여자. 그러니까, 여자. 필라르 킨타나와 그녀의 소설을 만나게 해준 쪽프레스와 김미래 편집자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번역하다 보면 같은 부분을 하도 많이 읽어서 감정적으로 무뎌질 때가 흔한데, 이 책을 번역하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서 멈추고 쉰 기억이 난다. 마지막 문장을 번역하고 소용돌이치던 마음도. 다마리스와 같은 대명사를 공유하는 개 역시 ‘그녀’라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실행하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며, 여기 여자와 밀림의 이야기를 내려둔다. - 옮긴이 최이슬기
졸음이 밀려올 정도로 성격이 느긋하고, 덩치는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몇 행이고 몇십 행이고 뻔뻔하게 지면을 잡아먹는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 책들은 언제 들추어도 머리를 휘젓지 않고 생활을 방해하지 않아서, 아주 몰입된 적 한 번 없이도 어느샌가 책모서리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종이 끄트머리는 벌써 몇 겹으로 나뉘어 있다. 책들, 다 읽지 않고도 읽었다고 착각시키는 걱정 없고 조용한 책들로 가득 찬 낡은 나의 장 안쪽에 『암캐』가 들여진다면. 박힌 책들과 박힌 먼지들과 박힌 그 풍경은 타고난 느긋함을 잃고 만다. 아직 인쇄되지 않은, 만져진 적 없는 『암캐』는 구김 하나, 온기 하나 없이, 장과 벽에 기대지 않고, 갈피도 끼이지 않고 그저 서 있다. - 편집자 김미래
『암캐』는 남미에서 생활하는 흑인 여성의 일상에 스민 불평등과 인간의 모순된 내면을 아주 솔직하게 서술한다. 지나칠 정도로 개를 보호하려는 마음, 어린 시절 자신과 동일시한 니콜라시토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 갑자기 떠나고 제 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개를 향한 감정,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다가 일순간 자세를 바꾸고는 결국 가장 큰 폭력을 행사하는 의지 등…… 세계를 의심하지 않으려는 다마리스로 하여금, 삶은 그 의심을 자꾸만 부추긴다. 마지막 문장에 다다르기까지 나의 시선은, 마치 암캐를 바라보는 다마리스처럼 다마리스를 두둔하고 연민하면서 미워했다. 이 소설의 많은 장면이 축축하다. 날씨와 공간이 다마리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이. 나무와 덩굴로 우거진 숲은 다가가기 두려운 과거의 절벽으로 향하는 길이며, 두려움을 거두고 진흙을 밟으며 암캐를 찾아 헤매는 곳이다. 그래서 『암캐』의 독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빠져 들어 숲 안으로 선뜻 걸어 들어가기를 바라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숲을 표지로 삼았다. 숨 가쁘게 넘어가는 종이만큼 쪽 번호도 신경질적으로 내달린다. - 디자이너 정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