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정신적 극복’을 꿈꾼 미완의 기획
한 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독일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어 소설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여기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을 제치고 첫자리를 차지한 것이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무질은 오늘날 더욱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전집이 새로 발간되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접근성도 한결 높아졌다. 작가로서 생전에 충분히 받지 못한 평가와 인정을 이제는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특성 없는 남자』의 배경은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하고 새로이 ‘현대’가 도래한 20세기 초 유럽(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일명 ‘카카니엔’)이다. 실증주의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개인은 분해 가능한 요소들의 합으로 해체되어 통계상의 수치로 환원되고, 중요한 일도 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에 관해 종합적인 인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각자 자신의 관점대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이러한 실존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의 정신적 여정이 담긴 작품이다. 무질은 20여 년을 매달려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했으나 끝내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1919년부터 ‘스파이’ ‘구원자’ ‘쌍둥이 남매’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 집필을 시도한 끝에 1930년 『특성 없는 남자』 1·2부, 이어서 1932년 집필중이던 3부의 앞부분을 출간했고 이때만 해도 머지않아 작품을 끝맺으리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집권과 잇따른 이차대전이 작가의 삶과 작품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았다. 시대의 소요 속에 소설의 방향성은 여러 번 수정될 수밖에 없었고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정치적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1938년 3부의 속권을 출간하기로 어렵게 결정하지만 미처 교정쇄를 다 확인하기도 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고 출판사도 망명길에 오르며 계획도 무산된다. 무질 역시 기존에 작성했던 스케치와 초고를 챙겨 스위스로 망명해 작업을 이어갔으나 출판 금지와 금서 지정으로 작가로서의 입지가 좁아진 탓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1942년 무질이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특성 없는 남자』는 1만 1천여 장에 달하는 유고를 남긴 미완의 소설로 남게 되었다.
“이 책은 풍자가 아니라 확실한 공식이다. 고백이 아니라 풍자다. 심리학자를 위한 책이 아니다. 사상가를 위한 책이 아니다. 쉬운 책도 어려운 책도 아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열할 필요 없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다면 직접 읽는 것이 최선이다. 작가인 나를 비롯해 타인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직접 읽기를 권한다.” _로베르트 무질
무질은 작품을 구상하던 단계에서부터 갖고 있던 아이디어 중 많은 부분을 폐기하지 않고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간직했다. 비록 완성된 형태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작품에 관해 남긴 방대한 기록을 통해 그 방향성과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1926년 로베르트 무질은 “내가 표현하는 대항적 흐름, 세력 그리고 운동의 모든 총합이 바로 전쟁이었고, 전쟁일 수밖에 없었으며 여전히 그렇다”고 언급했다. 끝내 실현되지 못한 소설의 결말에 관해서는 “모든 노선은 전쟁으로 치닫는다”고도 썼다. 『특성 없는 남자』는 기계 이성의 힘이 최고조로 발현된 시대에 일차대전에 이어 이차대전의 전쟁을 불러온, 유럽 정신의 몰락과 문명의 야만을 예고하는 역사적 궤적이 담긴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전형적이고 도식적인 개념으로 추상화된 현대의 삶을, 파편화된 이 세계의 무질서를 정신적으로 극복해내기 위한 대담하고 야심찬 기획으로 이 소설을 썼다.
사유하는 주인공, 에세이즘의 탄생
성(姓)도 없이 시종일관 이름으로만 불리는 주인공 울리히에겐 ‘특성 없는 남자’라는 별명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개성이 없다는 말과 같아 보이지만 실제 맥락상의 의미는 정반대에 가까워서, 식별 가능한 특성이 없어 유형화시킬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개별 인간이 여러 속성과 기능의 총합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분해되고 조립되기를 거부하는 그의 존재는 유별나다고 여겨진다. 사실 울리히는 현대적인 삶에 요구되는 모든 능력을 전부 갖춘 탓에 어떠한 가능성이든 내포하고 있는, 확정되지 않은 존재다. 그 의미도 애매한 ‘위대한 남자’가 되고 싶어 군인, 공학자의 길을 거쳤고 지금은 수학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수학적 사고에 매혹을 느꼈기 때문인데, 수학의 정밀한 눈으로 삶을 꿰뚫어보고 새롭게 사고할 수 있다면 인간은 지금과 다른 식으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자기 삶에서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이른바 ‘삶으로부터 일 년 동안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듯 보이는 아들을 염려하는 현실적인 아버지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살필 겨를도 없이 여러 유력 인사가 조직한 애국대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이 운동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줄거리를 구성하는 사건으로 작용한다. 이웃나라 독일에서 빌헬름 2세의 즉위 삼십 주년 행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항적인 의미에서 더욱 성대하게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칠십 주년을 기념하려는 의도를 담은 까닭에 ‘평행운동’으로 불리는 운동이다. 『특성 없는 남자』가 1920년대 들어 집필되기 시작한 작품이고 전쟁의 경험을 계기로 쓰인 작품임을 감안하면, 일차대전으로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해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시점에서 제국과 황제의 평화와 영광을 기리는 ‘평행운동’을 서사의 주축으로 삼은 것은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이 운동이 추진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작품 속에 담긴 풍자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온갖 분야의 지식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장은 실상 비슷비슷한 내용 일색이고, 사람들은 회의를 보람 있게 마무리하기 위해 무엇이 됐든 상관없이 결론 내린다. 어마어마하게 밀려드는 민중의 소망을 정리한 두 개의 서류철에도 지표나 방향이 없이 각각 ‘○○로 돌아가자’와 ‘○○로 나아가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시대는 나아가야 할 곳을 잃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옛것으로 회귀하거나 진보로 나아가기를 부르짖는다. 누구도 제대로 된 상이 없는 채로 각자 현상의 일면만 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울리히는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한다.
“진리를 원하는 사람은 학자가 되고, 주관성의 놀이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아마 작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_1권, 제2부 393쪽
그러다 어느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을 때 울리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 아니면 ‘불가능성’을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한다. 그리고 3부에서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 잊고 있던 ‘샴쌍둥이’ 여동생 아가테를 만나고 나서는 둘만의 독자적인 목표점인 ‘다른 상태’의 도덕적 삶, ‘천년제국’을 향해 나아가자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특성 없는 남자』은 서사나 사건 위주의 전통적인 소설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주인공 울리히와 그 주변 인물들의 내적 사유가 이 책의 핵심이 된다. 현실 속에서 사건은 추상적, 간접적, 파편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인데 작가가 여전히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전개나 하나의 단일한 서사에 의존한다면 시대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무질은 새로운 글쓰기 전략을 취한다. 차례에서 보다시피, 장면 단위로 소제목을 상세하게 달아 어떤 내용이 이어질지를 미리 알려주는가 하면, 2부 28장 ‘건너뛰어도 되는 장’이나 68장 ‘여담’에서처럼 뛰어넘고 읽어도 되는 장을 구분해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서사의 진행에 상관없이 주인공 울리히가 어떻게 행위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주변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이 소설을 진행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이 인물들의 내적 독백이 담긴 문장들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세계의 무질서, 유폐당하고 분열된 개인의 실존이 비로소 드러난다. 이런 에세이적 성격은 사건보다 사유의 흐름이 중요한 이른바 ‘사유 소설’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발한다. 작품에서 에세이를 “하나의 대상을 여러 절(節)로 나누어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삶과 세계의 모습도 에세이를 닮아야 한다고 한 대목이 있다. 대상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에세이야말로 개별적인 것의 가치를 담보하면서도 총체성에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기 위한 작가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민족 이중 국가체제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카카니엔’)을 배경으로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계의 합일을 꿈꾸던 인물들의 여정을 다룬 내용 면에서도, 기존 소설 형식의 한계를 극복한 독창적인 에세이즘적 글쓰기를 택한 구조 면에서도, 내용과 형식 사이의 합일을 도모해나가는 이 과정에서 무질은 오늘날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남겼다. 같은 장을 스무 번씩 고쳐 쓸 정도로 자신의 현실과 일치하는 소설을 쓰고자 집요하게 노력한 무질과 여러 갈래의 가능성으로 남게 된 울리히의 지치지 않는 탐구가 겹쳐 보이는 지점이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안타깝게도 사유하는 인간만큼 문학작품 속에서 재현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고 했으나,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이를 획기적으로 입증해냈다.
마지막으로 150여 권의 책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해온 박종대 번역가는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 핵심 인물에 대한 소개를 곁들인 상세한 해설을 3권 말미에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독일에서 ‘무질의 노벨레’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1996년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학업을 중단해야 했는데, 논문을 마저 끝내지 못한 아쉬움을 이 번역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이제야 학문과 연결된 삶의 한 시기를 갈무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질을 떠나보낼 수 있을 듯하다”고 밝힌 개인적 소회에서 보다시피, 번역가는 무질의 대표작 『특성 없는 남자』의 한국어판을 완성도 높은 번역으로 내놓기까지 꼬박 십 년간 이 책 번역에 매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