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화상어록≫은 태고의 선사상이나 고려 말의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상당 설법에서나 수좌와 사대부를 대상으로 쓴 글에서 시종일관 화두 참구를 강조했다. 그는 화두 참구의 기본으로서 ‘무자’ 화두를 중시했다. 그가 정형화된 스타일로 ‘무자’ 화두를 제시했던 것은 14세기 이후 고려 선종계의 사상적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간화선이 정형화, 형식화되어 불교계를 풍미한 것은 당시 ≪몽산법어(蒙山法語)≫, ≪선요(禪要)≫ 등 간화선의 매뉴얼로 정리된 선 문헌이 수용되고 유행했던 분위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깨친 후에 반드시 본분 종사, 즉 조사로부터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 그 자신이 네 차례나 깨달음의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원에 들어가 석옥에게 인가를 받았던 것은 간화선의 정형화와 관련된다고 하겠다. 아울러 태고가 인가라는 형식을 굳이 원의 조사에게서 받고자 했던 것은 원 불교계를 순례하는 풍조가 유행하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태고가 주장한 ‘무자’ 화두 일변도의 화두 참구나 유심정토설의 표방, 임제선 법통설 등은 당시 불교계의 흐름을 대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 말의 불교가 이러한 사상적인 슬로건을 표방한 것은 한마디로 선종이 절대화되던 경향을 반영한 것이자, 불교계의 흐름을 그러한 방향으로 주도하고자 하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고려 불교계에서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 등의 다양한 종파와 함께 존재하던 선종이 고려 말에 이르러 불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스스로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에서 표방한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종 절대화의 경향은 간화선 일변도의 경향으로 나아감으로써 결국 수행 방법론의 다양성을 상실하는 폐단을 가져왔다. 나아가 이러한 경향은 불교의 새로운 단계로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고, 당시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불교 비판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불교가 현실적인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계를 노출했던 것이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된 ≪태고화상어록≫ 중, 고려 말 불교사의 흐름과 관련해 태고가 제기한 간화선 수행론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 주된 대상이 누구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중심으로 발췌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