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라디오 만들던 열일곱 살 무렵에 시와 인연
▲ 열일곱 살 무렵부터 쓰기 시작하셨는데, 열일곱 살이면 감성이 풍부한 시절이지요?
▼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를 쓰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시인이 되고 싶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럭저럭 진공관 라디오 만드는 걸 좋아해서, 납땜을 해가며 라디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동급생 중에 시를 좋아하는 녀석이 있었어요. 그 녀석이 쓴 시를 저는 아주 좋아했지요. 한번은 그 녀석이 ‘잡지를 내려고 하는데 시 좀 써줄래’ 하면서 꼬드기는 거예요. 그래서 써보니까, 어찌어찌 시 비슷한 것을 쓸 수 있길래 재미가 붙어서 계속했다…….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시를 쓸 때의 정신상태는 좌선 때와 비슷
▲ 문득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다니카와 씨의 정신상태랄까 정신작용은 어떤 느낌일까요?
▼ 저도 잘 알기 어려운데요. 선禪에 관한 책 같은 걸 읽어보면, 좌선하고 있을 때와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 좌선은 무아의 경지, 잡념을 버린 세계이겠군요.
▼ 저도 뭔가를 쓰려고 할 때는 가능한 한 제 자신을 텅 비우려고 합니다. 텅 비우면 말이 들어옵니다. 그러지 않고 내 안에 말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판에 박은 표현으로 끌려가버리지만, 가능한 한 텅 비우면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어온다, 그런 느낌입니다. 호흡법과 닮은 데가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말은 의식 아래에 있는 말이 재미있다
▼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은 의식의 표면에 있는 말보다 의식 아래에 있는 말이 재미있다, 그쪽이 새롭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의식 아래에 있는 말이란 곧 말이 되지 않은 말?
▼ 그렇습니다, 혼돈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 온갖 언어경험이 다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듣는 언어경험뿐만 아니라 문학, 영화, 텔레비전…… 그 모든 일본어 경험이 들어가 있고, 그 혼돈과도 같은 데서 자신의 의식이 아닌 어떤 것이 말을 골라주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 쓴 기억이 없는데’ 하는 일이 흔히 생기고는 합니다.
일상생활과 시의 관계
▲ 고맙습니다. 그러한 체험에서 시의 스타일이나 작법 같은 것이 어떻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저 자신은 그런 식으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데요. 평론하는 사람들은 뭔가 이런저런 비평을 해줍니다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저를 꽤 바꾸어왔거든요. 예를 들어 죽음 같은 것도 실감나게 다가온다든지. 그런 요소들이 있어서 바뀌어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시를 쓴 지도 60년 이상 되기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은 셈이지요.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작법이 가능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제 실제 인생에서도 나이를 먹다보니 아주 편해지는 거예요. ‘이제 슬슬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겠지’, 뭐 그런.
그리고 이혼도 하고 아이도 착실히 독립했고 해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잖아요. 혼자라는 게 정말 홀가분하거든요. 그러다보니 시에서도, 예를 들어 저는 20대에도 자기소개 비슷한 시를 쓰고, 30대에도 조금 쓰고, 이번에는 70대에 또 쓴 겁니다만, 그것을 비교해보면 제 자신을 남들에게 소개하는 형식으로 쓴 시가 사뭇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것은 제 자신이, 말하자면 성숙했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
벌써 반세기 넘는 동안
명사와 동사와 조사와 형용사와 의문부호 따위
말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오다보니
굳이 말하자면 무언無言을 좋아합니다
저는 공구들에 정이 갑니다
또한 나무를, 관목灌木을 포함해서, 무척 좋아하지만
그것들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과거의 날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권위라는 것에 반감을 품고 있습니다
사시에 난시에다 노안입니다
집에는 불단佛壇도 감실龕室도 없지만
실내로 직결된 커다란 우편함이 있습니다
잠은 저에게 일종의 쾌락입니다
꿈을 꾸어도 깨면 잊어버립니다
여기에 이야기한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만
이렇게 말로 하고 있자니 왠지 거짓말 같군요
따로따로 사는 아이들 둘 손자 넷에 개나 고양이는 기르지 않습니다
여름에는 거의 티셔츠 차림으로 보냅니다
제가 쓰는 말에는 가격이 매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_「자기소개」 일흔 살 버전 전문
자신이 온몸으로 파악한 언어로 쓴 시가 좋은 시
▲ 잘된 시는 어떻게 짓는 것입니까?
▼ 그런 걸 알았으면 고생 안 했겠지요.(웃음) 모릅니다.
시라는 게 공부해서 잘 쓰게 되는 그런 건 아니잖아요. 음, 그러니까 그거는 매우 어려운 점이지만, 잘 쓴다 못 쓴다 하는 것도 매우 주관적인 거지요. 그리고 잘 썼지만, 뭔가 상투적인 문구가 말끔하게 늘어서 있는 정도인 시도 있거든요. 그런 거는 못 쓴 시보다 재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온몸으로 파악한 언어로 쓴 시가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의외로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상투어구를 죽 늘어놓아 시처럼 보이는 시를 쓰고 마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 거는 역시 재미가 없어요.
산다는 것 전체를 파악하려면 죽음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 어째서 그랬을까요? 어머니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고, 행복한,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생활이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물론 그렇습니다만, 결국, 그러한 현실의 일상생활만이 아닌, ‘산다’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산다는 것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을 시야에 넣지 않으면 산다는 것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 그것은 다니카와 씨 내부에서 왜 그런지 모른 채로 감지하고 있었던 겁니까?
▼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죽음이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뭐 그러한 시구를 쓰기도 했었으니까요.
사람은 시정詩情을 찾는다
▲ 현실에서는 우울해질 만한 일이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그 속에서 시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일본어로 ‘시’는, 행갈이를 해서 쓴 시작품이라는 의미와, 또하나 시정詩情(poesie), 이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제 시작품은 상당히 힘을 잃었고, 시정은 시작품뿐만 아니라 게임이라든지 만화, 영화나 텔레비전 같은 것에도 스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시작품이 아니라 시정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 거 아닌가,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재의 유행을 보면, 귀여운 것과 까불거리고 예쁜 것 따위잖아요. 그런 게 제 눈에는 시정에 대한 일종의 갈증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작품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소 쇠퇴한 느낌이 들겠지만, 시정이라는 면에서 생각하면 온갖 것에 시가 침투하고 있는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산문적인 가혹한 현실이 있고, 그것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지를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대항하고자 하는 그런 면이 있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낙관할 수는 없지만요. 그러한 경향이 거꾸로 풍속風俗으로 흘러가버려, 인간의 현실에 제대로 다가서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요.
시대가 얼마나 살벌해지든, 어떠한 시대가 되든, 인간의 혼이 시정을 찾는 경향은, 저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