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5월 1일, 모두가 ‘어린이’라는 새 깃발 아래 모였다!
‘어린이해방선언’ 100주년에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 100년사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3년 5월 1일은 우리 역사에서 잊지 못할 날이다. 바로 이 땅에 어린이 권리와 해방을 위한 최초의 선언문을 발표한 날이자, 어린이가 어른들의 윤리적·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세계 인류사에 최초로 명시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여러 소년운동단체는 어린이를 보호하고 훈육하는 것이 아닌 ‘해방’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각자의 이념과 갈등을 뒤로하고 오직 ‘어린이’라는 새 말을 깃발처럼 내세워 서로의 뜻을 모았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는 3가지 조항을 골자로 한 이날의 「소년운동의 기초 조항」은 1924년 제네바 선언보다도 앞선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 해방 선언이다.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은 100년 전 한자리에 모였던 조선의 아동문학가들이 그랬듯이, 연구·비평·출판·창작·교육 등 각계의 인사 57인이 함께 뜻을 모아 한국 아동청소년문학 100년사를 친절하고 간명하게 개괄한 주제어 사전이다. 편찬위원회가 장르 및 비평 용어, 작가 및 작품, 문학사적 사건이나 논쟁, 단체 및 미디어 등의 영역에서 총 100개의 키워드를 추리고, 집필위원들이 각자가 맡은 시대별 기본 개념과 용어를 재정비함으로써 우리 아동청소년문학 100년이 걸어온 발자취를 생생히 기록하였다. 지금껏 우리 문학장에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역동적인 역사를 오롯이 담아낸 주제어 사전이 없었던 만큼,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은 문학 독자와 연구자는 물론 ‘어린이’라는 존재에 관해 모색하는 일반 독자에게도 신선한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뛰어난 인물과 작품, 역동적인 사건과 논쟁이 넘치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사 100년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이 고르고 골라 내세운 100개의 키워드 중 첫 번째는 다름 아닌 ‘동화’이고 두 번째는 ‘동시(동요)’이다. 둘 모두 근대 ‘아동의 발견’과 더불어 전문 작가가 성인이 아닌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헤아린 문학으로 정의된다. 1920년대부터 제도적으로 정착된 ‘동화’와 ‘동시’로 말미암아 어린이들은 비로소 자신들만을 위해 창작된 문학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차례를 살펴보면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사에서 1945년 해방 전으로 분류되는 키워드가 36개나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온갖 탄압이 자행되었던 일제강점기에도 수많은 아동문학가가 분투하며 창작과 출판에 몰두하였다는 여러 기록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동요 「설날」과 「반달」로 잘 알려진 윤석중은 시인으로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동시에 『소년』 등 당대 어린이잡지에 최고 수준의 아동문학과 사진 및 그림을 선보인 선도적 편집자이기도 했다.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문학장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1930년대 동화작가 현덕이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비로소 “뛰어난 유년동화의 고전”인 ‘노마 연작’ 동화와 함께 빛을 본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 밖에 일제강점기 어린이책에 뛰어난 그림을 그려 온 정현웅 등의 삽화가, 최순애·김복진·권오순·신지식 등 현대적 의미의 아동문학 창작 및 번역 활동을 최초로 시작했던 여성작가들은 현대 한국 그림책의 세계 진출과 더불어 우리 아동문학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데 초석을 다진 주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아동청소년문학 100년사에 밝은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은 ‘친일아동문학’ 등의 키워드에도 분량을 할애해 일본의 식민 정책에 협력하여 조선의 어린이를 전시체제 아래의 황국신민으로 길러 내는 데 부응한 문학 역시 존재했음을 명시한다. 독자들은 100개의 키워드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과 작품의 공과를 두루 논함으로써,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를 이루는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첨예한 자기반성과 인식 갱신을 거듭한 지난 100년
아동청소년의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권리를 찾아 나선 여정
기념비적인 인물과 작품을 내보이며 근대사를 관통해 온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은 현대에 들어오며 더욱 난도 높은 논쟁과 마주함으로써 질적·양적 성장 역시 거듭한다. ‘동시도 시가 되어야 한다’는 핵심 아래 동시의 언어 형식과 기법에 변화를 일으킨 1960년대 ‘본격동시’ 논쟁, 좌우 이념의 대결 아래 대두되었던 1970년대 ‘아동문학의 서민성’ 문제, 아동문학이 추구해야 할 문학적 성취가 무엇인지 따졌던 2000년대의 ‘동화의 소설화’ 논쟁, 그리고 ‘일하는 아이들’과 ‘유희정신’이라는 두 문학사적 과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하는 아이들을 넘어서’ 논쟁 등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에는 창작자와 연구자가 꼭 읽어야 할 문학사적 사건 및 논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은 항상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첨예한 자기반성과 인식 갱신을 추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수십 년에 걸쳐 아동문학가들이 각자의 문학적 사상과 성취를 걸고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의 활동 기반에 1923년 5월 1일의 어린이 해방 정신이 자리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군부 독재 시절 산업 역군과 권력에 순응하는 엘리트 양성에 반대해 교육민주화운동을 벌인 교사들, 도서 시장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2000년대에 어린이도서관 건립 및 독서문화 확산을 위해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한 도서관 전문가 및 시민 단체, 아동문학 담론을 여러 매체로 꾸준히 출간해 온 출판 관계자들, 세월호 참사의 진상 파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행동에 나서는 한편 자신들의 작품에 사건을 반영하거나 애도하며 스스로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했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들……. 각자가 발 딛은 땅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문학과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가 다르지 않았다.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의 역사와 미래를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은 두고두고 곁에 둘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