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서부로 추방된 왕족, 셰어브릴.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가족도 후견인도. 여기 외에는 갈 곳도 없어서, 어떻게든 버텨야만 해. 이곳이 내 끝이야. 그건 내가 뭐든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이곳뿐이란 말이기도 하지.”
패망한 왕국의 망명 왕자, 레오닉스. 그리고 모두의 재앙이자 비밀스러운 제국의 마법사, 카니발의 왕.
과연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인가.
또한, 누가 주도자가 될 것인가.
브릴은 레오닉스의 손이 팔에 닿는 것을, 마치 우연인 듯 귓가와 이마 언저리를 스치고 건드린 것을 느꼈다.
착각일까? 하지만, 정말 닿았다.
불쾌한 접촉은 아니다. 그것은 조심스러웠고,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긴장과…… 갈망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신은 많은 것을 해야겠지요. 누가 왕이 될지, 당신에게는 아주 큰 문제겠지요. 내게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지만, 당신에게는 되찾아야 할 고향이니…… 당신이 싸우는 이유는 그것이겠지요. 이 나라의 왕위도, 권력도, 다른 이야기일 뿐. 발카니아를 위해 지금 당신이 가진 하일드를 지키고, 당신을 따르는 망명자와 싸우는 것. 이 나라를 지켜야 살데니아와 싸울 수 있고, 살데니아를 이겨야 당신의 조국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브릴의 눈은 레오닉스의 제복을 향했다.
청색이다. 아주 짙은 청색.
바다와 강철의 색이다.
차갑고 거친 색이고, 또한 무자비한 색이기도 하다.
“셰어브릴.”
레오닉스가 말하자, 브릴은 남자의 제복에서 눈길을 떼고 레오닉스를 보았다.
“지금 번거롭다, 아주. 그런데 내가, 나 스스로가 더 번거로워지는 것을 자청하기도 하지.”
레오닉스는 브릴의 눈과 마주했다. 그 순간, 브릴은 그의 눈에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 표정, 모든 것을 빨아들여 삼킬 듯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기어코 가서 자청하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권
결국, 수도로 돌아온 셰어브릴.
그곳에서 망명 왕자 레오닉스와의 관계가 진척되는 가운데, 카니발라의 지나친 관심과 접근이 감지된다.
제국의 마법사가 원하는 건 무엇이고, 레오닉스가 감추고 있는 엘리안과의 비밀은 무엇인지.
“숙부님이 나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하는데, 당신이 나를 지켜줘요.”
“지켜? 누구로부터.”
브릴은 레오닉스의 턱에 손을 얹었다. 바깥쪽 턱에 손을 얹은 것이기에, 멀리서 보면 브릴이 레오닉스의 얼굴을 당기는 것으로 보였다.
“숙부님과 이 나라의 모든 남자로부터.”
브릴은 붉게 번지듯 웃었다.
바라보는 레오닉스의 시선도 따뜻했다.
사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그럼, 어떻게 해 달라는 건가.”
“모두에게 보여 봐요. 내가 당신을 손에 넣었고, 그러니 그 누구도 나를 거래할 수 없다는 걸. 당신이 내 남자라는 걸 보여 봐요.”
“소문이 나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날수록 좋죠. 멀리멀리, 널리 널리.”
레오닉스의 입술 끝이 미소를 담았다.
여태 보였던 미소가 그저 자연스러운 웃음이라면, 이 웃음은 확실히 심술궂어 보였다.
레오닉스는 여름연회의 악동을 다시 본 것 같았다.
독특하고 오만방자한. 내가 원하니까 당신은 해야 한다는 듯 구는.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다른 남자가 나에 대해 엄두도 못 내게만 해 주면 돼요. 로버트 왕자에게는 천하의 버르장머리 없는 왕자지만, 나는 당신의 오만함이 좋아요.”
“보답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요. 나는 싸움을 잘 하고, 당신을 위한 기사가 될 수 있어요.”
입술 끝이 더 올라갔다.
“그건 천천히 생각하지.”
3권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위에 서게 된 듀카르니아.
후계자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고, 셰어브릴은 왕족이자 유력한 후보자로 관심과 경쟁의 대상이 된다.
마침내, 운명의 밤에 분열된 왕국의 세 세력이 충돌하고 브릴도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춤, 잘 출 수 있어요?”
“그대는?”
“객관적으로는 말 못 해요. 내 상대는 하나뿐이었고, 그 상대는 양처럼 순했거든요. 내가 발을 밟거나 걷어차도 춤을 잘 춘다고 칭찬했을 거예요.”
레오닉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좋은 남자일 거야.”
“어떤 의미로요?”
“내가 여기서 제일 좋은 종마 비슷한 거야. 내가 인간적으로 부족한 게 있다면, 내 지위와 권력에 점수를 줘. 그러면 부족한 면이 좀 채워질 테지.”
브릴은 웃었다. 자기가 직접 그리 말하면 어떻게 하나.
레오닉스는 브릴의 등을 당겼다.
“어떻게든 그대 마음에만 들면 되는 거지, 포에닉시아.”
“왜 그렇게 부르나요.”
“동대륙식 존칭이다. 여자면 포에닉시아, 남자면 포에닉시온. 포에닉스, 즉 불사조. 불멸의 존재. 영광의 대상, 이런 것들.”
브릴은 몰랐지만, 한동안 황제도 그리 불렸었다.
불멸이라.
브릴은 입으로 구슬을 굴리듯 중얼거려 보았다.
불멸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레오닉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불꽃, 열기, 욕망. 영혼을 불타게 만드는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