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정치와는 거리가 먼 개념
그리스 시대 이래로 ‘혁명적 정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지만, 오늘날 ‘혁명revolution’의 기원이 되는 용어는 라틴어 ‘revolutio’다. 그렇지만 별의 순환에서 기원한 ‘revolutio’의 의미는 ‘어떤 시간 단위의 경과나 회귀’ 혹은 ‘세상의 순환이나 반복’으로 정치와는 관계가 멀었다.
혁명이 시간과 결합해 있는 동안, 서양 중세까지 정치적인 변화는 ‘봉기seditio/rebellio’, ‘모반coniuratio’, ‘반란insurrectio’ 등으로 쓰였다. 중세까지 언어 사용은 지배자 중심이었고 일방적이었으므로 그 단어들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세 말 정치적 의미 획득
‘혁명’이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 개념의 전환은 중세 말에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이해되고 사용되는 개념은 ‘프랑스 혁명’ 이후 일반화되었다. 즉 1789년 전후에 비로소 개별적이었던 혁명의 요소들이 ‘혁명’ 개념 속에 하나로 묶여 특정한 경험과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근대 혁명 개념에 응축된 경험과 기대는 크게 두 영역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헌법의 변경을 초래하는 봉기’로서 폭력적 격변, 정치 변동이다. 넓게 보면 혁명은 전 사회 차원에서, 정치는 물론 학문, 문화까지를 포괄하는 역사의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현대에 접어들어 후자는 더 강조되었고 마침내 혁명은 역사철학적으로 의미를 확장했다. 그것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의 진보적 미래를 향한 변동을 의미했다.
혁명은 언제나 반혁명을 내포
그러나 혁명이 ‘진보와 미래’만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광범위한 역사철학적 지위의 획득은 혁명의 전통적 의미 곧 순환과 회귀, 소요와 내란이라는 요소에 대한 강조가 나타날 수 있게 했다. 결국 혁명은 대립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의미와 다의성을 지닌 개념이었고 이 같은 성격은 혁명 개념을 쉽게 이데올로기화하기도 했고, 반대로 이데올로기 비판에 활용되게도 했다.
저자 코젤렉은 본서의 서두에서 혁명 개념의 모순과 흥미로움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혁명’ 개념처럼 그렇게 유례없는 독특성과 반복 가능성, 통시적인 양상들과 동시적인 양상이 자체 속에 함께 결합되어 있는 역사적 기본 개념은 없다. …… 한 독일어 번역을 인용하면 ‘변혁’으로 혁명은 분명하게 미래를 가리킬 수도 있고, ‘회귀’를 뜻할 수도 있다. 혁명 속에는 항상 동시에 반혁명이 내포되어 있다.”
‘revolution’, 한자문화권 동아시아에서 ‘혁명’으로 번역되면서 서양과 다른 파장
참고로 ‘혁명’은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도 매우 문제적이다. 서양어 revolution의 번역어로 쓰이기 이전에, 혁명은 오랫동안 ‘천명天命의 변화[革]’에 따른 왕조교체를 의미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그것이다.
revolution의 번역어로 혁명이 선택된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 혁명이 쌓아올린 경험과 기대는 또 다른 역사 경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거기에 revolution의 번역어인 혁명이 더해지자 서양과는 다른 파장과 근대 기획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지점에서 동아시아의 개념사는 개념으로 보는 역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임은 분명하다. 이 점을 의식하며 본서를 읽는다면 더욱 흥미를 배가시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