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보낸 장수 정기룡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에 정기룡이 있었다!
정기룡이 없었다면 영남은 없었고,
영남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없었다.
(起龍無則 嶺南無, 嶺南無則 我國無)
선조임금은 정기룡 장군의 활약을 이처럼 높이 평가했고, 1605년 장군을 원종선무일등공신(原從宣武一等功臣)에 취품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하지만 장군을 견제하려는 권력자와 그 공적을 시기한 관원들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장수를 상대로 별별 모함을 다하며 탄핵과 치죄를 추진했다. 그들에 의해 장군이 세운 전공은 폄훼되고 업적은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장군의 활약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목격하고 기록한 난중록(亂中錄)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그 덕분에 단편적으로나마 60여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장군의 활약상이 후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정월 7일. 본진 및 함창과 문경의 관군이 합세하여 좌·우위군으로 나누고 상주판관 정기룡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대개 정 성주(城主:정기룡)는 비단 용감하고 강건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부지런히 적을 토벌하며, 나라를 위해 죽고자 자신을 잊었기 때문이다.
의병장 조정이 기록한 정기룡 장군의 활약상 일부이다. 전후 장군은 경상도방어사로 강등됐고, 후에 김해부사를 역임했다. 1607년(선조 40년) 용양위부호군(龍?衛副護軍) 겸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올랐고, 밀양부사, 중도방어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 등을 역임했다. 1610년(광해군 2년) 상호군에 올랐고, 1617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삼군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재임하며 통영 진중에서 눈을 감아 영원한 군인으로 남았다. 1773년(영조 49년)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충의공 정기룡 장군. 그는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함께 울었다.
육지의 이순신, 조선의 조자룡으로 불린, 정기룡 장군!
60여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신이 내린 장수!
사라진 금오신화
■ 현존하는 《금오신화》가 진짜 《금오신화》일까?
-숨겨진 ‘금오신화’를 둘러싼 침공과 방어, 그 치열한 혈전
-‘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의 창작과정’에 대한 창조적 재해석
《금오신화》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라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개하여 전국을 떠돌던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에 정착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하지만 현존 《금오신화》는 당대의 문장가이자 저항적 지식인이었던 김시습의 작품치고는 다소 미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혹시 진짜 《금오신화》는 어딘가 숨겨진 게 아닐까, 하는 가정으로부터 《사라진 금오신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실제로 김시습보다 조금 후대인 조선 중종대의 김안노(金安老, 1481~1537)는 자신의 저서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매월당이 금오산에 들어가 책을 써서 석실에 넣어두고는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작가는 이 기록으로부터, 과연 현존하는 <금오신화>가 석실에 넣어둘 만큼 비밀을 요하는 내용이었을까, 석실에 넣어둔 글이야말로 당대의 감시를 피해 꼭꼭 숨겨야 했던 진짜 《금오신화》가 아닐까 하는 추론을 끌어냈다. 역사적 기록과 작가의 상상력이 만나 쓰여진 소설이 바로 《사라진 금오신화》이다.
《사라진 금오신화》는 오세신동으로 불렸던 천재적 문장가이자 저항적 지식인이었던 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의 창작과정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다. 당대 최고 지성의 붓끝에서 나올 매섭고 날선 문장이 역사에 새겨질 것이 두려운 세조와 당대 권력자들은 김시습이 금오산에서 쓰고 있다는 글을 없애려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고, 김시습은 그런 음모로부터 자신의 글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한다. 《금오신화》를 둘러싼 침공과 방어, 그 치열한 혈전이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금오신화>를 없애려는 자들은 암살 시도와 회유, 감시(사찰), 첩자의 침투, 여자의 유혹 등 갖은 방법으로 김시습이 쓰고 있는 글의 실체를 파악해 빼돌리려 하고, 이에 맞서는 김시습은 허허실실의 전략으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이야기들을 쓰며 진짜 《금오신화》를 은폐하려 한다. 그 과정이 마치 공수를 주고받는 장기처럼 긴장과 재미를 선사한다.
김시습을 노리는 상대들은 금오신화를 없앤다는 목적은 공유하나 그 입장은 다른 두 부류이다. 그의 붓끝이 두려우면서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회유하여 같은 편으로 만들려는 세조와 신숙주 같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장 직접적으로 단종 폐위와 세조 옹립에 앞장섰던 정찬손과 김질 같은 척신들은 자객을 보내고 첩자를 심는 등 노골적인 공격을 단행한다. 이런 온갖 음모로부터 자신의 글을 지키려는 김시습의 지난한 창작기가 마치 하나의 공격을 방어하면 곧장 다음 공격이 이어지는 게임처럼 펼쳐진다.
김시습의 창작과 발언에 대한 끊임없는 방해와 감시, 사찰의 풍경은 권력의 불법 민간 사찰 같은 사건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한 풍자로도 읽힌다. “천 년 후에나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외치며 권력과 술수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김시습의 모습은 오늘날 자신의 신념과 문장을 지키려 분투하는 수많은 ‘김시습’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1980년 서울의 봄이 신군부의 등장으로 물 건너가고 작가들이 필화사건으로 고통을 받으며 지식인이 사찰 대상에 올랐던 그 세월을 생생하게 체험한 경험으로부터 이 소설을 맨 처음 착안했다며, 이 시대의 《금오신화》를 쓰고 있는 수많은 김시습들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고 밝혔다. 시대적 외연을 넓히기 위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사라진 금오신화》는 소설과 동화 등 전방위적 집필 활동을 펼쳐온 저자의 필력과 한국사 전공자로서의 역사적 상상력이 매끄럽게 결합하여 주제의 깊이와 소설적 재미가 잘 어우러진 매력적인 역사소설이다.